햇살이 따사로운 오후입니다. 연차를 내고 냥이와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말 집에 오면 냥이는 주말집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지곤 합니다. 나의 자존에 언제나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냐옹이니까요.
무심한 듯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냥이의 눈빛을 볼 때마다 “고양이는 신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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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룸에서 나른함을 즐기고 있는 냥이에게 주말 집사는 어쩔 수 없이 찰칵 소리를 냅니다. 한쪽 다리를 쭉 뻗고 게으른듯한 고고함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음악과 고양이
아마 슈바이처도 저렇게 온전한 평안을 즐기는 냥이를 곁에 두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은 음악과 고양이”라는 말을 남겼으니까요.
찰칵 소리에 경고하듯 레이저 눈빛을 보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 사전>(2011)에서 한국에 고양이가 들어온 것은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질 때라고 합니다.
경전을 쥐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고양이를 데려왔다는 말이지요. 고양이의 기원을 보면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가축화가 이루어졌는데, “고양이님께서 인간을 집사로 낙점하였다”는 일부 가설도 있긴 하지요.
거듭된 찰칵 소리에 고고한 냥이는 이내 관심을 꺼 버립니다. 고대인들은 쥐로부터 일상을 보호하기 위해 고양이들을 곁에 두었는데, 현대인들은 관계의 대체재로서 기꺼이 집사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집사가 되고나서부터 스테판 가르니에의 산문집, <고양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2017)를 찾아 읽었고, 일본 영화 <고양이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2015)까지 보았습니다.
계속되는 촬영 소리에 우리 집 냥이는 아예 고개를 돌리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스테판 가르니에의 말처럼 고양이를 통해 자존감과 타인과의 관계, 본질과 덧없는 것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던 것인가를,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그렇게 일상을 받아들여야 함을 냥이는 무심하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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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집사가 조용하자 냥이는 다시 집사를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세상에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봐도 크게 틀림이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슈바이처, 그리고 찰스 디킨스와 발자크 같은 이들이 고양이를 좋아했고, 카이사르, 그리고 히틀러와 나폴레옹 같은 이들은 고양이를 싫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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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냥이는 어슬렁거리며 아래층 침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내며 평온을 즐깁니다. 냥이가 가르릉 거릴 때는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집니다.
나의 자존에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가르릉 거리는 소리는 백마디, 천마디의 말보다 그 힘이 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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