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소설

재미 있게 읽었던 소설에 대한 상세한 리뷰를 공유합니다

  • 피어클리벤의 금화 1권, 신서로의 판타지 장편 소설

    신서로의 판타지 장편 소설 <피어클리벤의 금화 1>(2019)은 기대보다 흡인력이 강했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트와일라잇 시리즈, 브레이킹 던 시리즈를 완독한 판타지 문학 열혈 애독자가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건대 몇몇 단점만 보완하면 합격점을 받을 만한 수작이라 하겠다.

    피어클리벤 이야기를 읽으면서 김용의 <영웅문>이 자꾸 생각났다. 김용은 시간 경과를 ‘차 한잔 마실만큼’ 등으로 즐겨 표현했다. 신서로의 문장에서도 ‘주전자 하나가 끓어오를 시간 만에’ 등의 표현이 가끔 보인다.

    그리고 피어클리벤의 금화에는 한자어들이 읽기 거북할 정도로 매우, 매우 많이 남용된다. ‘아이를 키웠다’하면 될 것을 ‘아이를 훈육했다’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이 표현하는 지루한 빙식의 문장들이 너무 자주 나온다.

    “용, 지상 최강의 포식자이자 맹수인 동시에 신화의 계보를 증거 하는 실재의 현현, 분명히 피를 흘릴 줄 아는 필멸의 육체를 갖되, 재해에 준한 권능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한 반신의 적생자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빌러디저드’라고 불리는 용과 마법사들이 등장하고 마법사 학교도 나온다. 류그라족의 신목도 등장하고, ‘고블린’과 ‘트롤’이라 불리는 다종의 마수들도 등장한다.

    그리하여 시대 배경은 나오지 않는다. 제국, 기사, 영주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나 중세쯤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도시의 배경도 나오지 않는다.

    책표지

    그래도 주인공은 당연히 인간이다. 영주 피어클리벤의 팔 녀 ‘울리케’가 그 주인공이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빌러디저드의 식용으로 납치된 울리케의 담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가는 울리케가 용과 담판을 짓고, 고블린 족과 교섭해 나가는 과정을 기존 판타지 소설과 다른 세계관으로 그린다. 전투나 격투 장면 대신 치열한 논리 싸움들로 대체한다.

    그런데도 제법 읽을 만하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오밀조밀한 사건들이 적당히 배치되어 지겨울 틈이 없다. 은근히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여 책장을 빨리 넘기게 된다.

    당찬 소녀 울리케에게 박수를 보낸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믿고 나아가는 용기가 보기 좋다. 한번뿐인 인생을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사는 인생이 너무 많은 시대이지 않은가. 2권에서 울리케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전 8권까지 출간 계획인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현재 2권까지 출판되어 있다. 킬링 타임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이 판타지 소설을 추천한다.

    피어클리벤의 금화 2권, 줄거리와 주요 등장 인물 소개

  •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의 연애 소설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의 연애 소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언제 읽어도 강렬하고 여운이 오래 남는다. 소설가 샬럿 브론테의 비극적인 생애와 맞물려 오늘도 어디선가 그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제인 에어>는 샬럿 브론테가 커러 벨이라는 중성적 필명으로 1847년 발표한 작품이다. 당시 여성들에 대한 편견을 의식해 브론테가의 세 자매는 모두 자신들이 여성임을 숨기기 위해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세기 가부장적인 영국 사회에서 발표된 <제인 에어>는 최초의 여성 성장 소설로 평가받지만, 개인적으로는 성장 소설이라기보다 연애 소설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아주 어려서 고아가 된 제인 에어는 외숙모와 그 남매들에게 냉대를 받다 자선학교 로우드 학교에 보내진다.

    로우드 학교는 전염병이 돌아 40여 명의 학생들이 죽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지만 템플 교장선생님과 헬렌 번즈와 친구가 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쌓기 시작한다.

    제인 에어는 템플 선생님이 결혼하여 학교를 떠나자 자신도 로체스트 가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떠난다. 제인 에어는 로체스트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 서약 직전, 로체스트에게 숨겨진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로체스터의 숨겨진 아내 버사 메이슨이 등장하는 과정은 고딕 소설의 전형을 따른다. 기괴하고 음침하여 소름이 돋는다. 미치광이 버사 메이슨은 후대에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이 되었다.

    로체스트가 미치광이 버사 메이슨을 왜 저택에 가두어 학대를 하면서도 이혼은 하지 않았는지, 제인 에어에게는 왜 비밀에 부쳤는지, 제인 에어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왜 로체스트를 떠났는지는 미심쩍은 부분이다.

    아무튼 제인 에어는 로체스트의 정부가 될 수는 없다며 도망치듯 떠나고, 우여곡절 끝에 세인트 존 리버스와 그 여동생들을 만나 구사일생한다.

    리버스 남매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제인 에어는 세인트 존이 청혼을 하지만 그의 청혼을 경멸하며 다시 로체스트에게 돌아가고 만다. 그가 제인 에어를 사랑이 아닌 선교사 아내라는 도구로 봤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는 대저택 화재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잃고 한 팔을 잃은 로체스트를 만나 기꺼이 평생 그의 눈과 손발이 되겠다며 결혼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제인에어 책표지

    결국 <제인 에어>는 가난한 고아였던 소녀가 온갖 역경을 딛고 가정교사로 들어갔던 대저택의 주인과 결혼에 성공한다는 통속 로맨스 소설과 다를 바 없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줄거리만 보면 제인 에어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했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그녀는 연인 로체스터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제인 에어>가 지금으로부터 173년 전에 발표된 소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제인 에어는 얼굴도 예쁘지 않았고 몸매도 볼품없었다. 그리고 불같은 성격에 고집이 셌다. 현대의 많은 소설가들도 여자 주인공의 외모를 묘사할 때 ‘예쁘다’와 ‘섹시하다’는 점을 은연 중 어필한다.

    그런 부류의 작가들은 첨단의 이 시대에도 예쁨 받는 것을 떠난 여성성을 생각조차 못한다. 여류 작가들조차 그렇다.

    샬럿 브론테는 그런 여성성을 그녀의 소설에서 과감히 지웠다. 대신 여자로서 산다는 것과, 여자로서 사랑한다는 것을 깊이 고민했다. 빅토리아 시대에서 제인 에어 같은 소녀는 도대체가 나올 수 없는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그녀 역시 교사 시절 유부남 교장을 사랑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제인 에어를 통해 그녀의 사랑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로체스터를 불구로 만든 다음에야 제인 에어를 그에게 돌아가게 만든 건 여전히 괘씸하지만 말이다.

    사랑은 지금도 진보 중이다. 여성과 남성을 떠나 사랑의 최종 목적지는 거의 대개 ‘결혼’을 비껴가고 있다.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과 여성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의 제인 에어는 로체스트를 사랑할 수 있을까.

    * 크레올이었던 진 리스는 버사 메이슨 시점에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소설로 제인 에어를 다시 썼고, 영화화된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카리브 해의 정사>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지만 작품성은 꽝으로 알려졌다.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상문학상 수상거부 작가 이기호 초단편 소설

    이상문학상 거부 작가들

    요즘 문학계에서는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가 이슈다. 올해 이상 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로 결정된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작가가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를 했다.

    그리고 지난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던 소설가 윤이형은 최근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운동과 관련, 자신도 작가로서 영원히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다며 절필 선언을 했다.

    문학계에서 이 무슨 끔직한 일인가? 작가의 절필 선언은 작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심각한 문제인데 말이다.

    이상문학상을 주체하는 문학사상사는 그간 이상문학상 ‘수상작에 대하여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여해 온 모양이다.

    이 무슨 갑질이란 말인가? 그것도 예술하는 양반들이 말이다. 대기업들의 행패는 그래도 돈을 버는 족속들이니 돈에 눈이 어두워 그럴수도 있겠거니 이해할 수도 있지만 출판사, 이들은 또 도대체 뭔 족속들인지 심히 유감스럽다.

    그래서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작가 이기호의 소설을 찾아 읽어 보았다. 요즘 초단편 소설에 꽂혀 있었기에 우선 그의 초단편 소설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를 찾아 읽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작가의 초단편 소설들은 그야말로 계몽 소설류의 그것으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이웃과 잘 지내라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가는 아직 1972년생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나이 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제발 좀 효도하라고 은근히 권할 만한 소설인 것 같다. 또 자녀 양육에 대한 어려움을 넌지시 토로하는 단편들도 많다.

    그래도 이상문학상 수상거부 운동에 힘을 실어주고자 리뷰는 쓰야 되겠고 그의 초단편 소설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한 편은 골라야 했는데, 그것이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의 이중 생활

    ‘남편의 이중 생활’이 그래도 그나마 요즘 사람들의 취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 같아 여기 소개한다. 남편의 이중 생활은 SNS에 푹 빠진 남편의 행각을 추적한 아내의 글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남편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들과 사진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는데… 참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더라구요. 거기엔 내가 그때까지, 그러니까 연애 기간까지 포함해 십 년 넘게 보아온 남편은 온데간데 없고, 감상적이고 섬세하고 따뜻한, 심지어 지적이기까지 한 남자가 있는 거예요. 일테면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만 싶다. 인도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잊고 산 내 꿈들이 방울방울 튀어 오르고 있다.’

    참 나, 이런 걸 그 흔한 말로 지랄도 풍년이라고 하나요. 우리 남편은요, 머리가 가늘어서 비가 오는 날을 유독 싫어하거든요. 휴일에 비 오면 칼국수나 파전 같은 것을 먹고 하루 종일 소파에서 뒹구는 위인이죠. 그런 인간이 잊고 산 꿈 운운하니 이게 무슨 산성비를 소방 호스로 잘못 맞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초단편은 아마 요즘 남편들에게 혹은 요즘 아내들에게 헉, 또는 헐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할 소재일 것이다. SNS는 유저들에게 끊임없이 가면을 씌우고 마치 연예인인마냥 한껏 뽐내도록 한다. 어디 SNS 뿐이랴. 블로거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적인 것처럼, 감성적인 것처럼 행세하지는 않았던가 돌아본다. 지랄도 풍년이 되면 곤란하겠기에.

    아무튼, 문학사상사는 꼰대질을 관두고 지금이라도 각성하여 순진무구한 작가들을 팔아 돈 장사할 생각을 그만 접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SNS나 유튜버나 모든 유저들도 그만 이중 행각은 그만두고 자신에게 조금은 솔직해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최은영 소설 소개

  •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 아주 웃긴 최민석 초단편 소설집

    소설가 최민석의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이라는 초단편 소설을 읽었다. 요즘 초단편 소설이나 한뼘 소설이 유행한다고 하는데, 짧게 있기에 좋았다.

    작가 후기에서 최민석은 작가 생활 5년차에 확실히 소모적인 글을 써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글을 쓰면서 유희를 즐겼고 (시간) 소모적인 (기쁨의 측면에서) 유용성이 있었다고 했다.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은 키득거리며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로 확실히 시간 소모적인 측면에서 유용성이 있었다. 소설가 최민석은 타고난 이야기꾼다운 글재간을 부렸다.

    자, 그럼 ‘탐정 김평관’이라는 제목을 단 초단편을 살펴보자.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무리를 짓지 않는다. 소속되는 것도 싫어한다. 수임료는 현찰로 받지만, 돈애 구애받지 않는다. 내키면 때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다. 여인의 키스도, 노인의 인사도, 젊은이의 존경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르지 단 하나, 매일 밤 동경의 야경을 즐기며 하이볼 한잔 하는 것뿐이다. 그는 고독한 독신 탐정, 김평관이다.”

    뭔가 웃기는 B급 영화의 정서가 느껴지는 이 대목은 뒤의 초단편에 김평관이 등장할 때면 어김없이 작가는 친절하게 복붙 해 놓는다. 작가는 심각한 말더덤을 표현하기 위해 “그”자만으로 두 페이지를 채워 놓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알량한 작가의 행동이 밉지는 않았다. 왜냐구? <미시시피의 모기떼의 역습>은 소모적인 유용성을 추구하는 초단편이라고 작가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다.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이라는 초단편을 중심으로 수십편의 이야기들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힌다. 어쩌면 초단편이라기보다 목적의식 없이 마구 흘러가버린 마구 이야기들이 억지로 뒤섞힌 중편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초단편의 장점은 아주 짧은 자투리 시간에 이야기 한편을 읽을 수도 있고, 그러다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면 본격적으로 작가의 다른 소설을 찾아 읽어볼 계기를 주는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그럼, 난 최민석의 다른 소설을 찾게 될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다. 다른 작가의 초단편을 또 읽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훗날 무엇을 해야될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이 산더미처럼 쌓일 때, 이 작가의 진짜 소설을 읽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