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소설

재미 있게 읽었던 소설에 대한 상세한 리뷰를 공유합니다

  •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네 통의 편지

    설흔의 <네 통의 편지>(나무를심는사람들, 2023)는 퇴계의 공부법을 소재로 엮은 일종의 팩션이다. 부제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를 봤을 때는 자기계발서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읽다 보니까 소설이었다. ㅋ

    2009년 출간된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를 리뉴얼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교육열이 높은 나라에서 이런 류의 책은 꾸준한 수요가 있는 모양이다.

    퇴계 이황이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나, 그의 공부법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공부를 했길래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대 유학자가 되었을까, 라는 궁금증에 저자 나름으로 답한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저자 설흔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로 2010년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수상했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삶을 소개하는 책들을 주로 써 왔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공저), <소년, 아란타로 가다>,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등을 썼다.

    네 통의 편지 줄거리

    소설의 도입부에서 일흔이 된 퇴계가 제자 이함형과 노비 돌석만 데리고 도산 서당을 떠나 청량산 중턱의 오가 산당에서 나흘간 머물고 오겠다고 하여 제자들을 경악시킨다.

    퇴계 이황의 생몰 연도는 1502년 – 1571년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퇴계는 일흔에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노인네가 산행을 가겠다고 하니 제자들이 경악할 만했다.

    청량산 오가산당에 도착한 퇴계가 앞으로 나흘간 하루에 한 사람씩 찾아올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것이라고 하여 이함형과 돌석을 또 한번 놀래켰다.

    배움에 목 마른 사람들이 보내온 은밀한 편지를 읽은 퇴계가 그 사람들에게 손수 가르침을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이함형과 돌석은 오늘은 누가 찾아올까 궁금해 하며 오가 산당의 사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풍경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첫날의 주인공은 대장장이 배순이었고, 두 번째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약방을 하는 최 의원의 무남독녀 최난희였다.

    그 무렵 퇴계의 도산 서당은 천하의 인재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명문 중의 명문 서당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지만 나이 마흔이 다 된 대장장이와 남녀유별이 엄했던 조선에서 처자에게 퇴계가 직접 가르침을 베푼다는 설정은 좀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싶다. ㅋ

    아무튼, 퇴계는 그런 배순과 최난희에게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고 배움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세세하게 가르쳐주는 대인배다운 풍모를 보인다.

    셋째 날은 또 누가 찾아올까, 하고 이함형과 돌석은 사립문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반전이 일어난다. 여기서 세세하게 다 말하면 혹시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의 재미를 반감시키게 되므로 줄거리 정리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네 통의 편지를 읽고 느낀 점

    퇴계 이황은 왠지 멀게 느껴지는 유형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 그나마 그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퇴계는 대학자였지만 과거 시험에 세 번 낙방하고, 3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문과 초시에 급제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천재가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조선의 대학자가 되었을까? 그의 공부법의 요체는 <네 통의 편지> 서문에 저자가 잘 정리해 놓았다. 이황은 제자 이함형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도 말고, 어려움을 꺼리지도 말며, 한 번 알지 못했다고 곧바로 포기하지도 말고, 그저 하던 걸 그대로 하면서 나아가십시오. (중략)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고생스럽게만 할 게 아니라, 때로는 한가하게 쉬면서 정서를 함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 네 통의 편지 저자 서문에서

    그런 마음 가짐으로 퇴계는 평생을 공부했던 것 같다. 퇴계는 책 한 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외운 후에야 다음 책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이 책에서 퇴계는 돌석에게 공부란 결국 마음을 다잡는 일이라는 것, 마음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 그 어떤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강조한다.

    <네 통의 편지>는 퇴계 이황을 그야말로 전심전력으로 공부에 매진하며 일생을 보냈던 인물로 그린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 때문인지 이 책은 지나치게 퇴계를 유교의 이상향으로 추켜세운다. 꼭 위인전을 읽은 기분이라고 할까?

    역사 소설을 읽을 때에는 주의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로 소설의 에피소드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예컨대, 퇴계가 노비 돌석을 면천시켜주는 에피소드는 역사적 사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인식의 오류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퇴계가 자식들에게 남긴 상속 재산은 전답이 36만 평이 넘었고, 노비는 370명에 달했을 정도로 대부호였다. 이황은 노비의 숫자를 불리기 위해 양천교혼을 자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진득하게 공부하는 마음 가짐을 다지는 데는 일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설정이 좀 유치하긴 해도 청소년기에는 아주 작은 계기가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도서 추천

  • 히가시노 게이고 범인 없는 살인의 밤, 단편 추리소설 추천

    히가시노 게이고의 범인 없는 살인의 밤(윤성원 옮김, 알에치코리아, 2009)은 작가의 초기작 7편을 묶은 단편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학원물도 있고 의외성이 돋보이는 단편도 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을 읽으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은 장편보다 오히려 단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편은 장황하게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단편은 문장도 나름 정제되어 있고, 추리 소설을 읽는 맛도 중구부언하지 않고 간결하게 좋았다.

    그간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중에서 반전이 가장 돋보이는 소설은 <위험한 비너스>(2017)이었다. 반전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한 추리 소설이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 수록작품

    • 작은 고의
    • 어둠 속의 두 사람
    • 춤추는 아이
    • 하얀 흉기
    • 굿바이, 코치
    •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옮긴이의 말

    히가시노 게이고 프로필

    1958년 오사카 출생. 고등학교 때 추리소설 습작을 했던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 1985년 추리소설 방과 후로 에도가와란 포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99년 비밀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갈릴레오 시리즈 중의 하나인 용의자 X의 헌신으로 2006년 제134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주오코론 문예상을, 2013년 몽환화로 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을, 2014년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패러디한 <그녀는 다 계획 있다>(원제 쿄코의 꿈 – 컴퍼니언 살인사건),  백조와 박쥐, 공허한 십자가, 희망의 끈,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숙명, 방황하는 칼날, 녹나무의 파수꾼, 백야행, 가면 산장 살인 사건,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가가 형사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등이 있다.

    책 표지

    범인 없는 살인의 밤 줄거리

    소스케 씨 댁에서 가정교사 안도 유키코가 가슴에 칼이 찔린 채로 발견된다. 소스케 씨의 아들 다카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다카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또 다른 가정교사 다쿠야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손목에 손가락을 대더니 그녀가 죽었다고 말한다. 안도 유키코는 어떻게 칼에 찔렸을까?

    다카오와 안도 유키코가 말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다카오가 유키코를 힘껏 밀치는 바람에 유키코가 작은 탁자 쪽으로 쓰려졌다. 그때 테이블 위에 과일을 담아둔 그릇이 놓여 있었고, 거기에 있던 칼이 유키코의 가슴을 찔렀다. 그녀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 다카오는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를 듣고 집 안에 있던 모두가 달려왔다.

    안도 유키코가 어떻게 칼에 찔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위의 정보는 소설 단편 범인 없는 살인의 밤 후반부에 가서야 제공된다. 이는 누가 왜? 안도 유키코를 살해하였을까에 관심을 계속 돌리게 하면서 독자가 정작 사건의 실마리가 될 단서에는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교묘한 전략이다.

    아무튼, 소스케 씨는 가정교사 안도 유키코가 아들의 칼에 찔려 숨지자, 사건을 은폐하기로 하고 다쿠야에게 뒷수습을 부탁한다.

    그날 현장에는 소스케 씨, 그의 부인 도키에, 큰아들 마사키와 막내 다카오, 다카오의 가정교사인 다쿠야, 다섯 명이 있었다. 다섯 명은 서로 입을 맞추고 다큐야와 마사키가 야심한 밤에 멀리 산속으로 가서 시신을 매장하기로 했다 소스케 씨가 그들이 출발할 때 졸음 방지용이라며 껌을 건넸다.

    그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유키코의 오빠 안도 가즈오가 나타났다. 유키코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그녀를 만난 적이 있는지 소스케 부부에게 캐묻고 다녔다. 부부는 모른다고 발뺌은 했으나 불안해한다. 

    그 후 폭우로 산사태가 났고 다큐야가 묻었던 사체가 드러났다. 그들의 예상보다 사체가 너무 빨리 세상에 드러났다. 형사 다카노와 오다가 탐문 수사를 시작했고, 그들은 은폐했던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다카노가 사체가 들어있던 널빤지 상자에서 등대꽃 잎사귀를 제시하자 소스케 씨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등대꽃은 소스케 씨 집의 담장울타리도 등대꽃이었던 것이다. 등대꽃의 결정적 증거에 다카오는 순순히 자백한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위에서 인용했던 안도 유키고가 어떻게 칼에 찔렸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며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듯하다. 하지만 사건이 여기서 이렇게 단순하게 끝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 아니다. 게이고는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결말을 준비해 두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 결말(스포일러)

    형사 다카노는 시신의 목에 걸려 있었던 껌에 주목했다. 마사키가 사체를 매장으로 하러 산으로 갈 때 껌을 씹었다고 진술했었다. 그렇다면 안도 유키코는 껌을 씹다 매장되기 직전 살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범인은 다쿠야였다. 안도 유키코는 소스케 씨에게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다쿠야는 돈을 뜯어내려면 약점을 만들어야 한다며 안도 유키코에 칼에 찔린 채 죽은 척하자고 제안했다. 다쿠야는 범행에 소스케 전처의 아들인 마사키도 끌어들였다. 

    그런데 다쿠야는 사전 모의와는 달리 산속에서 안도 유키코를 죽여버렸다. 그 이튿날, 다쿠야는 그의 애인 가와이 마사미를 새로운 가정교사로 소스케 씨에 들였다. 다쿠야는 안도 유키코를 ‘마시미’라는 가명으로 가정교사로 일하게 했었다.

    추리소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사건이 일어났던 ‘밤’ 꼭지와 그 이후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이라는 꼭지가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금’의  화자는 다쿠야이고 ‘밤’의 화자는 안도 유키코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들이 ‘밤’의 화자는 당연히 마사미일 것이라고 추정하게끔 서술트릭을 썼다. 이 정도면 사기에 가깝게 독자를 우롱하는 서술트릭이다. ㅋ

    다른 네명에 시체를 포함시킬 독자는 없으리라.
    다른 네명에 시체를 포함시킬 독자는 없으리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서술 트릭은 단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의 초반부에 나온다. 작가는 사건 현장에 다른 네 명이 있다고 하면서 ‘나’가 누군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이 마사미로 혼동하도록 만들었다.

    좀 치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읽는 동안은 재미가 있었다. 책장을 덮으며 아, 뭐야를 연발하긴 했지만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추천

  • 아니 에르노의 탐닉, 처연한 사랑에 대한 각주

    탐닉, 단순한 열정을 기록한 대담한 일기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의 <탐닉>(조용희 옮김, 문학동네, 2004)은 처연한 사랑의 기록이자 격정적인 욕망의 기록이다. 아니 에르노는 1991년 소련 외교관 S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단순한 열정>을 발표하고 10년이 지난 2001년, 그녀가 그 시기에 썼던 일기를 묶은 <탐닉>을 발표했다.

    소설 탐닉은 아니 에르노가 소련 외교관 S와 사랑에 빠졌던 시기(1988년 9월 27일에서 1989년 11월 6일까지)에 쓴 일기와 그가 소련으로 떠난 이후 사랑에 대한 여운을 기록한 1990년 4월 9일까지의 일기가 담겨있다.

    책표지

    그러니까 탐닉은 소설 <단순한 열정>에서 기록하지 못한 산문적인 서사를 확인해 볼 수 각주 인 셈이다. <탐닉>을 읽으며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욕망을 미학적인 고려는 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도 않고 사실 그대로 기록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기록한 1988년 10월 18일과 19일의 일기를 보자.

    아니-에르노의-일기
    아니 에르노의 18일, 19일 읽기

    작가는 매 순간 흘러가는 현재를 따라가며 그를 사랑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온갖 일들과 상념들을 오롯이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다. 그것은 그리움이었고 사랑이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자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기도 했다.

    아니 에르노 프로필과 단순한 열정

    작가 아니 에르노의 프로필과 단순한 열정은 이전 글에서 다루었으니, 아래 글을 참고하시면 된다. 다만, 작가는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낫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는 트라우마를 안고 하류계층을 벗어나려는 필사의 노력으로 교수가 됐고 작가도 되었다는 점을 첨언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공허한 삶을 견디어내는 유일한 동력이 되었다. 작가는 지적이고 ‘탄탄한’ 남자와 함께 무언가를 이루어나가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애무와 욕망, 꿈, 환상 들로 삶을 대체했다. 작가의 곁에 잠시 머물러 있는 남자가  작가의 유일한 현실이 되었고, 탐닉을 쓰는 시기에는 그 남자가 소련 외교관 ‘S’ 였다.

    사랑의 색깔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름답고 행복하고 예쁜 것들과 대개 연관 지어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격정적이다 못해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해서 처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랑도 있다. 아니 에르노의 사랑은 아마 그런 색깔을 띨 것 같다. 그녀의 삶과 사랑을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은 처연함을 느끼곤 한다.

    물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탐닉을 읽으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것은 독자의 자유니까. 그렇다고 해도 탐닉에는 사랑에 빠지면 나타나는 다채로운 현상들,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떠나가면 나타나는 예후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사랑의 실체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재료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에르노보다 실체적인 삶과 사랑을 대담한 용기로 기록해 나간 작가는 지금껏 없었으므로.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줄거리와 결말, 소설 같은 연애 이야기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줄거리와 결말, 소설 같은 연애 이야기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작년 가을, 아니 에르노가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이 놀랬다. 내 기억 속에 그녀는 성적으로 굉장히 대담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편견은 내가 아니 에르노가 쓴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자전적인 소설 <단순한 열정>(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2001)과 일기를 엮은 <집착>(조용희 옮김, 문학동네, 2004), 단 두 편만 읽은 결과였다.

    단순한 열정은 48세였던 작가가 35세였던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과의 불륜을 그린 연애 이야기이고, <집착>은 그 시기에 그녀가 썼던 일기를 그대로 출판한 책이었다. 아래 책표지는 옛날 책표지에서 디자인을 많이 했다.

    책 표지

    당시 두 아들이 있는 이혼녀였던 아니 에르노는 작가이자 교수였고, 외교관 S는 유부남이었다. <단순한 열정> 줄거리에는 프랑스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했던 그와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불륜을 이어가고 그가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녀의 내밀하고 고통스러운 연애 감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소설 단순한 열정의 분량은 단 74페이지에 불과하다. 그 짧은 분량에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몸을 관통했던 정욕의 실체를 어떠한 문학적인 미학이나 형이상학적인 은유 없이 사실 그대로만 기록했다. 그것은 놀라운 자기 관찰이었고 자전적 글쓰기의 새 지평이었다. 

    은밀한 성적 사생활이 날 것 그대로 담긴 단순한 열정은 출판되자마자 프랑스에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나 또한 적잖은 당혹감과 혼란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문학의 경계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고, 과연 어디까지 쓸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고 어디까지 기록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열정이 가지는 파괴력이 여기에 있다. 단순한 열정은 허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기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형식의 소설일 수도 있다.

    작가는 억압과 차별, 부끄러움에 맞서는 용기로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썼다. 그녀의 작품에는 대학 시절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 천박한 부모, 가부장적 남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단순한 열정과 집착은 그중에서도 자신의 몸을 통과해간 정염을 그녀만의 문장으로 기록해 나간 소설이다.

    단순한 열정 줄거리

    ‘올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소설 단순한 열정의 첫 문장이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성적인 사생활을 기록하는 첫 문장으로 이 문장을 썼다. 작가는 이어서 자신이 본 그 영화를 묘사하고는 이 작품을 쓰는 자신에게, 또 단순한 열정을 읽는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에서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의 유보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아니 에르노는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그 남자는 이브 생 로랑 정장과 세루티 넥타이, 그리고 대형 승용차를 유난히 좋아하는 속물이었고, 출세 지향적인 소련 공산당의 충복이었다. 프랑스 여성 작가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누가 그를 보고 알랭 들롱을 닮았다고 하면 굉장히 좋아하는 미성숙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아니 에르노는 그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화장을 할 때에도, 머리 손질을 할 때에도, 매니큐어를 바를 때에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도 오직 그만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원고를 고친다거나 책을 읽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할 정도로 오직 그 만을 생각하는 나날.

    그 남자의 욕정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알기 위해 프로노를 보고, <육체적 사랑의 기교>와 같은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는 언제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희망으로 새 옷이나 귀고리, 스타킹을 거울 앞에서 하나하나 몸에 맞춰본다. 여성 잡지에서 운세란을 찾아 읽으며 오늘은 그가 연락을 해 올까 마음 졸이며 기다린다.

    아니 에르노는 그와 불륜의 관계를 지속하며 자신이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애인의 아내를 질투하면서도 그와 그의 아내, 셋이서 나란히 앉아 공연을 보기도 하고, 그와 정사 후 그 사람의 몸이나 옷에 자신의 흔적이 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녀는 자신과 정사를 나누며 보낸 오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문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고, 그 이유를 찾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제약들이 아니 에르노의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작가는 단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한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으므로. 

    단순한 열정 결말

    아니 에르노는 그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그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을 생각하고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와의 만남을 계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지는 날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조자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아파왔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고통은 도처에 있었다.”(49쪽)

    그가 떠난 이후 아니 에르노는 하루하루를 시간을 헤아리며 지내게 된다. ‘그 사람이 떠난 지 이 주일째야, 이제 다섯 주가 지났구나, 작년 오늘은 내가 거기 있었지, 나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했어’

    아니 에르노는 주말이면 일부러 집안 청소나 정원 손질 같은 고된 육체 일에 매달렸다. 그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이제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그 사람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예전처럼 그녀의 일상을 집요하게 차지하고 있지도 않다. 그래도 그 사람에 대한 세세한 기억들이 문득 되살아나는 일이 있다. 

    그즈음 그가 떠난 이후 처음 전화를 걸어왔고, 그녀는 예전처럼 그가 본 적 없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그를 기다리다 하룻밤 정사를 하고 그의 호텔까지 차로 태워다 준다. 그녀는 낭테르에서 퐁드뇌유까지 가는 동안 빨간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뜨겁게 그를 껴안고 애무했다. 그남자는 다시 만나지 못했고, 그 사람은 사흘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작가는 그날 저녁 홀연히 왔다 간 그 남자는 예전에 그가 여기 있을 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 자신의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님을, 그 남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아니 에르노 프로필

    1940년 9월 1일 프랑스 노르망디 소도시 릴본에서 출생, 이브토에서 가난한 소상공인 부모 아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루앙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교사가 되었다.

    필립 에르노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 다비드와 에릭을 두었다. 남편과는 1980년대 초 이혼했다. 1971년 현대문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2000년까지 문학교수로 일했고, 이후 프랑스의 국립 원격 교육 센터(CNED)에서 23년 동안 일했다.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장롱(옷장)>으로 등단했다. 1984년 <남자의 자리>로 르노드상을 수상, 2008년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상, 프랑수아 모리아크 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03년, 그녀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상’이 제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소설과 미발표 일기들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가 생존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되었다.

    작품으로는 <부끄러움>, <한 여자>, <사건>, <단순한 열정>(1991), 일기 모음집인 <탐닉>(2001), <집착>(2001), <사진 사용법>, 대담집 <칼 같은 글쓰기> , <얼어붙은 여자>, <카사노바 호텔>(2020) 등이 있다. 수위가 상당히 센 일기 모음집 탐믹은 아래 링크 글 참조.

    아니 에르노의 탐닉, 처연한 사랑에 대한 각주

    <사건>은 <레벤느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단순한 열정>은 2000년 영화화되어 제73회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우라나라에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202년 2월 1일 개봉됐다.

    아니 에르노는 2022년 “개인 기억의 뿌리, 소외, 집단적 구속을 밝혀내는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으로 프랑스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거주한 파리 교외의 신도시 세르지퐁투아즈에 살고 있다.

  • 히가시노 게이고 신작 희망의 끈, 줄거리와 결말

    히가시노 게이고 신작 추리소설 <희망의 끈>(김난주 옮김, 도서출판 재인, 2022)을 다 읽었다. 465페이지의 두툼한 이 소설책은 목차도, 작가의 말이나 번역자의 말도 없이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끈은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 되었다. 최근 작이라서 그런지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여성 비하적인 시선도, 장황한 수사 배경 설명도 많이 줄어 있었다.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도 형사들은 여전히 택배기사로 가장해 용의자들을 접촉한다든지 하는 등의 낡고 우스운 수사기법들을 자랑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걸 수사기법인 양 여러차례 추켜세운다. 이러한 쓸데 없는 내용들을 줄였다면 좀 더 매끈한 추리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여성 캐릭터 대부분은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나온다. 요시하라 아야코는 유서 깊은 료칸의 경영을 진두 지휘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비록 굴복해 그녀를 낳긴 했지만 동성애자로서 당당하게 살다 갔다. 

    요만한 구성이면 킬링타임 하기에는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희망의 끈은 추리 소설 본연의 퍼즐 맞추는 재미를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프로필

    1958년 오사카 출생. 고등학교 때 추리소설 습작을 했던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 

    1985년 추리소설 <방과 후>로 에도가와란 포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99년 <비밀>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갈릴레오 시리즈 중의 하나인 <용의자 X의 헌신>으로 2006년 제134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2012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주오코론 문예상을, 2013년 <몽환화>로 제26회 시바타렌자부로상을, 2014년 <기도의 막이 내릴 때>로 제48회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패러디한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원제 쿄코의 꿈 – 컴퍼니언 살인사건),  <백조와 박쥐>, <공허한 십자가>,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방황하는 칼날>, <녹나무의 파수꾼>, <백야행>, <숙명>, <가면 산장 살인 사건>,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가가 형사 시리즈〉,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등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중에서 반전이 가장 돋보이는 소설은 <위험한 비너스>(2017)↗이다. 반전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한 추리 소설이다.

    희망의 끈 줄거리

    프롤로그

    건설회사에 다니는 시오미 유키노부는 아내 레이코의 설득에 못 이겨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 있는 외가에 아이들을 놀러 보낸다. 딸 에마는 열두 살, 아들 나오토는 열 살. 나가오카시에 가기 위해서는 신칸센을 타고 전철로 갈아타야 한다. 유키노부는 초등학생인 아이들만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외가로 출발한 날 오후, 땅이 크게 흔들리고 건물 벽면이 붕괴되는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의 진원지는 니가타였다. 그 지진으로 에마와 나오토가 죽었다. 

    그 사고 이후 유키노부 부부의 일상은 공허함이 지배했다. 레이코는 플라워 디자이너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이 남기고 간 사진과 노트를 들여다보며 하루하루를 절망적으로 보냈다.

    유키노부는 아내의 삶에 새로운 희망의 끈을 이어 주기 위해 아이를 갖자고 권하고 난임 전문 클리닉에 다니기 시작한다. 레이코는 불임치료 1년 만에 체외 수정으로 임신에 성공한다.

    이후 <희망의 끈>은 15년 후로 훌쩍 점프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러한 전개를 즐겨 쓴다.

    야요이 카페 살인 사건

    지유가오카에 있는 카페 주인 ‘하나즈카 야요이’가 등에 칼에 꽂힌 채 카페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 나이는 쉰 하나, 칼날이 심장까지 찔렀고 사망 추정 시간은 오후 5시에서 9시 사이.

    경시청은 살인 사건 현장에 비추어 원한이나 금전, 치정 등이 얽힌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보고 카페 주인 살해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수사에 돌입한다. 

    수사를 지휘하는 인물은 ‘가가 교이치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가가 시리즈’를 이끌어 온 바로 그 형사이다. 하지만 <희망의 끈>에서는 형사 ‘마쓰미야 슈헤이’가 주변인들의 수사를 맡는 주된 역할을 한다. 가가는 마쓰미야 형사의 선배이자 사촌형으로 등장하나 조연 역할에 그친다.

    야요이 카페 살인사건 용의자들

    형사 마쓰미야 슈헤이는 탐문 수사 결과, 하나즈카 야요이가 그 누구로부터 원한을 살만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기품 있고 단아한 여성으로 반듯하게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된다. 가가 형사는 하나즈카 야요이의 통화목록, SNS 등 끈질긴 자료 분석과 수사 상황을 종합한 끝에 하나즈카 야요이의 용의자를 두 사람으로 압축한다.

    첫 번째 인물은 야요이의 전남편 와타누키 데쓰히코. 그는 십여 년 전 하나즈카 야요이와 이혼했다. 6년 전, 클럽 ‘큐리어스’에서 일하던 나카야 다유코를 만나 현재까지 그녀와 동거하고 있다.

    와타누키 데쓰히코라는 위인은 인생 최대의 목적이 자신의 2세를 갖는 것이다. 그는 아이가 생기자 않자 하나즈카 야요이와 이혼했고, 나카야 다유코와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6년째 동거만 하고 있을 뿐, 결혼은 아직 하지 않고 있다. 즉 혼전 임신이 그의 결혼 조건이었던 것이다.

    와타누키 데쓰히코는 하나즈카 야요이와 이혼 후 오랫동안 만난 적이 없었고, 그녀가 최근에 연락이 와서 딱 한 번 만나 근황 이야기를 했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마쓰미야 형사는 오랫동안 전남편에게 연락 없이 지내던 하나즈카 야요이가 왜 하필이면 죽기 얼마 전에 근황 얘기나 하려고 연락을 했을까 의문점을 갖는다.

    두 번째 용의자는 카페 단골손님 시오미 유키노부. 프롤로그에서 소개했던 그 인물이다. 프롤로그에서 15년이 흐른 후, 현재 시점에서 유키노부는 아내 레미코를 백혈병으로 잃고 열다섯 살 딸 모나와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다.

    시오미 유키노부와 하나즈카 야요이는 누가 봐도 연인관계로 보였는데, 그걸 애써 숨기려는 유키노부의 태도에서 마쓰미야 형사는 의아함을 느낀다. 

    한편, 마쓰미야 형사에게 유서 깊은 료칸의 주인 요시하라 아야코가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말기 암환자로 오늘내일하고 있으며, 아버지가 유언장에 마쓰미야 슈헤이를 아들로 선언했으며 그 유언장에 따라 마쓰미야는 그의 상속분을 청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자, 추리소설 희망의 끈이 제공하는 퍼즐은 여기까지이다. 이 퍼즐만 보고 독자들은 하나즈카 야요이의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들은 히가시노의 스타일 상 범인이 누구인지는 퍼뜩 감이 올 것이다. 그런데 왜 죽였을까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다음은 결말이다. 만약 이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동한 독자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아래 결말은 <희망의 끈>을 다 읽은 후에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희망의 끈 결말(스포일러)

    두 용의자, 와타누키 데쓰히코와 시오미 유키노부는 알리바이도 있었고, 살해 동기도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어 마쓰미야 슈헤이는 그 두 사람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기만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와타누키 데쓰히코 동거녀 나카야 다유코가 뜬금없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그녀의 자백에 따르면, 전부인 야요이를 만나고 온 이후로 와타누키가 ‘입양 방법’ 같은 걸 검색하며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하나즈카 야요이와 담판을 지으려고 카페로 찾아갔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하나즈카 야요이는 자신과 데쓰히코 씨 사이에는 아이가 있다, 다유코 씨는 다유코 씨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라, 아직 젊으니까 반드시 만남이 찾아올 거라고 말했고, 그 말에 빡친 다유코는 카페에 있는 칼로 그녀를 찌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마쓰미야 형사는 개인적으로는 료칸의 주인 요시하라 아야코와 이복 남매지간임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가 그를 만난다. 

    희망의 끈 트릭과 구멍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에서 던진 트릭은 시오미 유키노부의 딸 ‘모나’이다. 모나의 생물학적 부모는 와타누키 데쓰히코와 하나즈카 야요이다. 15년 전 병원 측의 어이없는 실수로 모나의 수정란이 레이코의 자궁에 이식되어 출산되었던 것이다.

    마쓰미야 형사는 탁월한 촉을 발휘해 이 진실을 수사로 밝혀내는데, 독자는 도저히 알 길이 없는 속임수였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런 유치한 트릭을 쓸 줄은 몰랐다. ㅋ

    카페 살인 사건 수사본부는 야요이 카페 입구 CCTV를 돌여보며 카페를 출입한 사람들을 탐문 수사를 했을 것인데, 나카야 다유코가 들어가는 장면만은 놓치고 말았던 모양이다. 추리소설 희망의 끈에서 용서할 수 없는 가장 큰 구멍이다. 일본 경시청 수사가 개판이든지. ㅋ

    용의자였던 와타누키 데쓰히코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딸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야요이가 죽는 바람에 그 딸을 찾기 위해 야요이의 휴대전화나 SNS 등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녀의 사후처리를 자처했다. 마쓰미야 형사는 이혼한 그가 왜 사후처리를 자처하는지를 수사의 중요 단서로 삼았다.

    데쓰히코가 바보가 아니었다면 수정란이 바뀌었다는 야요이의 말에 그들 부부가 다녔던 15년 전 불임 전문 클리닉을 찾아가 족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쉬운 길을 놔두고 야요이의 유품에서 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던 것이다. 두 번째 큰 구멍이다.

    이 외에도 희망의 끈에는 자잘한 구멍들이 많다. 인생사가 그렇듯 소설도 인생사를 닮았으니 그런 구멍쯤은 제쳐두고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희망의 끈에 대해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미덕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추천

  • 오가와 이토 달팽이 식당 줄거리, 요리가 만드는 힐링

    오가와 이토의 <달팽이 식당>(권남희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2)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여주인공이 작은 식당을 하면서 다시 일상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 소설이다.  2010년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가 작년에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도쿄 야나카에서 앤티크 기모노 가게를 하는 시오리가 유부남 기노시타 하루이치로를 만나 사랑에 빠져드는 이야기를 담은 오가와 이토의 <초초난난>(2011)을 잔잔하게 읽었다는 기억에 달팽이 식당도 읽어보았다.

    오가와 이토는 상처받은 주인공을 담담하게 토닥거리는 힐링 소설들을 많이 썼다. 음식과 요리 이야기도 많이 한다. 이 소설도 상처받은 주인공이 요리를 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도 안정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와가와 이토 프로필

    1973년 야마가타현 출생. 1999년 <밀장과 카레>로 소설가로 데뷔했다. 2008년 첫 장편소설 <달팽이 식당>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베트남어 등으로 번역 출간됐다. 2010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고 2011년 이탈리아의 프레미오 반카렐라, 2013년 프랑스의 외제니 브라지에 등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라이온의 간식》, 《패밀리 트리》, 《츠바키 문구점》, 《반짝반짝 공화국》, 《따뜻함을 드세요》, 《트리 하우스》, 《초초난난》, 《바나나 빛 행복》, 《이 슬픔이 슬픈 채로 끝나지 않기를》, 《양식당 오가와》, 《인생은 불확실한 일뿐이어서》 등이 있다.

    책표지

    줄거리

    링고의 인도인 남자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날랐다. 돈이며 가재도구, 남김없이 깡그리 들고 튀었다. 링고가 티르기예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니 집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도 세탁기도 냉장고도 형광등도 커튼도 현간 매트도 모조리 사라졌다. 링고가 호실을 착각했나 잠시 생각할 정도였다.

    고생해서 힘겹게 얻은 이 집에서, 밤이면 그와 한 이불속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잤는데. 요리사가 꿈이었던 링고가 매달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쪼개서 사 모은 밥그릇도 토스터도 쿠킹 시트도 삭 다 사라졌다. 심지어 할머니와 둘이서 하나하나 정성껏 닦아 담근 추억의 매실장아찌조차 병째 사라지고 없었다.

    링고는 남자친구와 식당을 창업하기 위해 매일 아침 주먹밥을 만들어서 점심을 때웠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돈은 벽장에 차곡차곡 모아두었었다. 벡만 엔 짜리 봉투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런 야비한 놈이 또 있을까. ㅠ

    다행히 현관문 옆 가스계량가 있는 좁은 공간에 보관해 둔 할머니의 겨된장 항아리는 그대로 있었다. 문자 그대로 말문이 막히는 상황이었으므로 링고는 실어증에 걸렸다. 링고는 겨된장 항아리 하나만 달랑 안고 열다섯 살 봄에 등을 돌린 이후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고향으로 가는 심야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달팽이 식당>의 도입부를 읽고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나쁜 놈들이 참 많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링고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남자친구를 키가 크고 눈동자가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링고는 왜 이리 순진하기만 한 걸까. ㅠ

    링고의 고향은 유방산 자락에 위치한 외진 산골 마을이었다. 도톰하니 부푼 산이 두 개, 서로 기대듯이 서 있는 유방산.

    멀리서 보면 누워 있는 여자의 유방처럼 보인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유방산이라고 불렀다. 유방과 유방 사이를 잇는 계곡에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번지 점프대가 있었다. (목표에도 유방산이 있긴 하다)

    건설회사 사장 네오콘을 애인으로 둔 엄마는 고향마을에서 술집 ‘아무르’를 하며 교태를 부리고 손님을 상대하느라 언제나 바쁘다. 십 년 만에 딸이 돌아왔지만 엄마는 식비와 난방비, 월세를 내고 반려돼지 엘메스를 돌보는 조건으로 같이 사는 것을 허락했다. 세상에 이런 나쁜 엄마가 있었다니. ㅋ

    링고는 창고로 쓰는 가건물에 작은 식당을 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옷을 벗겨 알몸이 된다 해도 요리를 만드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는 링고였다. 다행히 창고를 빌려달라는 말에 엄마는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라며 선뜻 승낙했다.

    식당 이름은 <달팽이 식당>으로 했다. 느리게 가자는 의미였다. 이메일이나 팩스로 면접을 봐서 하루 한 팀만 받기로 했다. 세상에! 면접을 봐서 손님을 받는 식당도 있었나? ㅠ 

    첫 번째 손님은 인테리어를 꼼꼼히 도운 구마 씨였다. 두 번째 손님은 수십 년째 항상 상복을 입고 다니는 첩 할머니였다.

    첩 할머니는 달팽이 식당에서 식사를 한 그날 밤 평생 못 잊어한 그 사람을 꿈속에서 만났고 상복을 비로소 벗었다. 달팽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사랑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번져갔다.

    손님을 위해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는 링고의 얼굴에 행복이 잔잔하게 흐른다. 일본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들은 링고의 레시피에 따라 음식을 만들면 맛있을 것 같았다.

    빵에 물기가 스며드는 것을 막고 맛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빵 표면에 수증기를 쐰 밀크초콜릿을 얇게 발랐다. 쌉쌀한 다크초콜릿보다 밀크초콜릿 쪽이 크림과 과일의 궁합이 좋다. 한입 물면 푹신푹신한 빵 사이에서 과일즙이 좌르륵 넘치고, 씹는 동안 은근하게 초콜릿 맛이 입안에 퍼진다.
    달팽이 식당 134쪽, 링고의 레시피 중에 하나

    링고의 정성스러운 요리는 거식증에 걸린 토끼조차 다시 식욕이 돋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거식증에 걸린 토끼라니! 토끼가 아프면 수의사에게 보내야 하는데. ㅋ

    엄마가-처녀였다는-이야기
    엄마가 처녀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링고

    아무튼, 달팽이 식당의 마지막 손님은 엄마의 손님들이었다. 엄마는 고교 시절에 사귀었던 일 년 선배 슈와 약혼했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엄마는 삼십여 년이 훌쩍 흘러 말기암에 걸리고나서야 슈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링고는 엄마의 소원대로 반려돼지 엘메스를 혼을 담아 요리해서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엘메스를 요리하는 묘사가 꽤 길다. 생명과 사랑은 순환한다는 의미로 반려돼지를 잡아먹는다는 설정인가 본데, 이 부분이 <달팽이 식당>에서 가장 뜨악했다. 소설의 중반부부터 너무 대놓고 동화처럼 전개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반려동물을 잡아먹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지 않나? ㅠ

    그리고 어느 날 비둘기가 쿵하고 유리창가에 부딪져 죽었고, 링고는 ‘죽음을 헛되이 하면 안 돼.’라는 유언같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링고는 무아지경으로 비둘기 요리를 해서 입에 넣어 삼킨다. 그때 “오”라는 탄성이 나왔다. 링고의 몸에 목소리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그리고 링고는 다짐한다. 먹고 나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요리를 만들자, 먹고 나면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는 요리를, 앞으로도 계속 만들자.

    독후감

    개정판 달팽이 식당에는 단편 ‘초코문’이 합본되어 있다. 달팽이 식당의 요리를 먹으면 사랑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게이 커플의 이야기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엉망이 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붙어있는 단편 초코문이 그나마 조금 남아있었던 잔잔한 여운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ㅋ

    내가 읽은 일본 여류 작가들의 소설에 한정해서 보면, 3대 여류 작가니 일본을 대표한다는 여류 작가들의 문장력이나 감성, 작품 구성능력이나 문학적인 완성도 등이 한국 여성 작가들에 비해 좀 형편없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달팽이 식당>도 초반부는 그러대로 읽을 만했는데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설정도 이상해지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렸다. ㅋ

    아무래도 내가 꽤 괜찮은 일본 여류 작가를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모양이다. ㅠ 아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겠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참 좋았는데, 그런 느낌이 들지 모르겠다.

    일본 여성 작가 소설 추천

  • 김선영 작가 시간을 파는 상점 줄거리와 독후감

    시간을 파는 상점 독후감

    김선영의 <시간을 파는 상점>(자음과 모음, 2012)은 어른들도 많이 읽은 청소년소설이다. 우리 집만 해도 아이 둘, 어른 둘이 모두 읽었으니까, 인기가 대단했던 걸로 기억된다. 서지사항을 보니 2013년 3월 22일 인쇄본인데 35쇄가 찍혔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청소년소설임에도 플롯 전개가 빠르고 문장도 단단해서 빨리 읽힌다. 청소년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도덕적인 강박도 많이 보이지 않고, 어른이 청소년을 대변하는 듯한 위세도 잘 보이지 않으니까 인기가 많았을 것 같다.

    그래도 주인공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훈훈하게 흘러가다 엔딩을 치는 것은 여전히 아쉽다.

    김선영 작가 프로필

    1966년 충북 청원 출생. 2004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밀례>로 등단했다. 
    2011년 <시간을 파는 상점>으로 제1회 자음과 모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밀례>와 장편소설 <특별한 배달>, <열흘간의 낯선 바람>, <시간을 파는 상점 2> 등이 있다.

    시간을 파는 상점 줄거리

    온조의 엄마 아빠가 서로 반한 건 지리산 계곡물이 엄청나게 불어났을 때였다. 당시 엄마는 야생동물 캠프를 주관하는 환경단체의 간사를 맡고 있었고, 아빠는 소방대원이었다. 지리산 야생동물 캠프가 열리고 있을 때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캠프 참가자들은 조난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온조 엄마 아빠는 여름철 장맛비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하지만 온조 아빠는 온조가 중학생이 되자마자 교통사고로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책표지

    온조는 혼자 일하는 엄마의 힘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제과점에서 알바를 시작했지만 부도덕한 점장에 맞서다 해고되었고, 베트남 쌀국숫집 알바는 코피가 나는 바람에 사흘 만에 관두게 되었다.

    온조는 어느 순간, 시간은 돈이 될 수 있으니 시간을 팔면 되는 거 아님?이라는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다. “시간을 파는 상점”을 인터넷에 오픈한 것이다. 주인장 온조의 아이디는 ‘크로노스’였다.

    크로노스(Chronos)는 그리스 신화에서 객관적인 시간을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크로노스를 시간의 신이자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거세하고, 아들들을 집어삼킨 신과 혼동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그 신은 이름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신인 크로노스(Kronos)이다. 이 크로노스가 제우스를 빼고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다 잡아먹어버린 농경의 신, 크로노스이다. 

    어쨌든 크로노스는 당신의 특별한 부탁을 들어드립니다,라는 문구를 걸고 당차게 영업을 시작한다. 

    시간을 파는 상점 첫 번째  의뢰인은 아이디 ‘네 곁에’였다. 그의 의뢰는 교실에서 누군가 급우의 PMP를 훔치는 걸 목격하고 그 PMP를 온조의 사물함에 넣어두었으니 PMP를 원래 주인이었던 학생에게 몰래 되돌려 주라는 거였다.

    두 번째 의뢰인은 ‘강토’였다. 그의 의뢰는 자기 대신에 할아버지의 점심을 맛있게 먹어달라는 거였다. 온조는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시간은 크로노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경험하기에 따라 행과 불행을 가르는 기회와 평생 동안 기억되는 순간을 관장하는 신, 카이로스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시간을 파는 상점 세 번째 의뢰인은 아이디 ‘풀꽃자유’였다. 그의 의뢰는 한 달에 두 번 지정한 곳에 편지를 직접 배달해 달라는 거였다. 온조는 한 달에 두 번 우편을 배달하러 갈 때마다 꽃편지를 들고 동화 속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온조는 이때만큼은 천국의 속삭임을 듣는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네 곁에’가 의뢰한 사건을 중심축으로 독자들과 밀당하며 마지막까지 끌고 간다. PMP를 누가 왜 훔쳤지? 네 곁에는 왜 그것을 온조에게 의뢰했지? 하는 궁금함들은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바람의 언덕에서 정점을 찍는다.

    시간을 파는 상점 결말

    여기서 줄거리를 미주알고주알 까발리게 되면 나중에 소설을 읽게 될 독자들의 재미를 앗아가는 결과가 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성인소설은 결말을 알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는 경우가 많지만.

    다만 시간의 상점을 운영하면서 온조가 인생에 가로놓인 시간을 깊이 생각하고 음미하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한 뼘 성장하여 단단하게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미리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거의 모든 청소년소설처럼 이 소설 또한 훈훈하게 해피엔딩이다.

    시간을-파는-상점-219쪽
    시간을 파는 상점 219쪽

    온조가 말하는 것처럼 그 누구도 시간이라는 신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스스로가 그 시간을 매순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어딘가로 도착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빛나든 빛나지 않든.

    사족으로 이 소설에는 결함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PMP의 이동 경로이다. 소설에서는 PMP 주인 → 훔친 자 → 네 곁에 → 온조→ PMP 주인 순으로 흘러간다. 즉, PMP 주인 → 훔친 자→ 네 곁에→ PMP 주인 순으로 하면 될 것을 굳이 온조를 개입시킨 당위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치명적인 결함인데, 시간을 파는 상점이 하는 일은 온조도 항변했듯이 한때 유행했던 결혼식 하객 알바나 친구 알바 등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소설이 덧없어지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자.

    책 속 시간에 대한 문장

    시간은 그렇게 안타깝기도 잔인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인가. 삶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 사이의 전쟁 같기도 했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는 그렇게 애달파 하고, 싫은 사람과는 일 초도 마주 보고 싶지 않은 그 치열함의 무늬가 결국 삶이 아닐까? (106쪽)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 작가의 소설

    마리 오드 뮈라이의 오, 보이! 꿀잼각 청소년 소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