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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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기의 테르미도르 반동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테르미도르 반동 후, 집정관 체제 하에서 프랑스 공화국 보안위원회의 특무대 대장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맞다. 물론 지금은 황제 나폴레옹이 아니라 폴 바라스 집정관의 눈에 들어 정부의 칼잡이 노릇을 하는 정치군인일 따름이지만 말이다. 소설의 도입에서 나폴레옹은 질문을 던진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책표지
책표지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로베스피에르는 정말 로베스피에르였는가?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 일었던 소란 속에서 로베스피에르는 행적을 감추었고 단두대에 끌려간 것은 그 대역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나폴레옹은 열혈 자코뱅1 당원으로 활동한 기록을 가졌으나 지금은 집정관의 명을 받아 자코뱅 탄압에 앞장서고 있는 정치군인이다. 혁명을 이끌며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한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흠모, 실패한 우상에 대한 경멸 등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 속에서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행적을 추적한다.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 국민 공회 의원들로부터 독재자라 음해당하며 지지세력인 상퀼로트들로부터도 외면받은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였을까. 대중에게 버림받은 끝에도 재기를 노리며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살아남았는가, 고독하게 최후를 받아들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혁명을 깊게 다룬다. 혁명을 다룬 이야기는 이 외에도 여럿 있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그와 차별되는 면모를 몇 가지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혁명에 대한 태도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모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혁명에 대해 다루고 있다. 두 작가 모두 실제로 한 때 혁명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둘 모두 혁명이 가진 파괴성과 그로 말미암는 문화적 파산을 지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혁명에 관한 입장 내지는 근대와 이성에 관한 입장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카리마조프의 형제들 중 이반의 주장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스 혁명을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그러나 오로지 이성을 통해 창조된 인간, 괴물이 고독감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하나님을 최고이성으로 대체하는 국교를 세우려 한 로베스피에르의 행적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가 모두 전통, 비이성, 관습, 신앙을 이성과 혁명의 대척점으로 두며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태도를 허무주의의 씨앗으로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에서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이성이야말로 허무주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룬 혁명의 근본적 대의는 공화국의 덕성과 정치로 모든 시민을 교화시키고 일깨우는 데 있었습니다. 오로지 그래야만 역사의 수레바퀴가 뒷걸음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혁명들은 그런 대의와 원칙에 밝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추악한 권력 다툼 속에서 구체제로 투항하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인한 대의와 원칙만이 그런 뒷걸음질과 투항을 재촉하는 허무주의의 유혹에 단호히 맞설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두르고 다니는 허무주의의 외피 또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혼동되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허무주의는 인민들의 마음에 구멍을 내서 공동체 의식과 연대에 대한 각성 대신 궁극적으로는 수구 반동 세력들에게 투항하고 말 개인의 자율적 의지와 독립적 내향성을 자기암시처럼 북돋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허무주의가 불어넣고 적극적으로 북돋우려 하는 개인의 자율적 의지와 독립적인 내향성은 결국 공화국 시민들 각자의 고립에 가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개인의 고립은 인민들이 부당한 정치권력의 행사에 궐기할 수 있는 저항 동력의 상실과 변혁의 욕망에 대한 포기로 귀착됩니다.”

“전제정의 속박을 분쇄하기 위한 자유 이외에는 이 세상의 어떠한 자유도 모두 음험하고 의심스러운 권력의 보균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소. 그것은 일차적으로 재산의 권력행사를 위한 자유요, 거기에 예속될 수 있는 자유만을 가리키는 데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오. 당통이 숱한 배임과 뒷거래 때문에 동료들에게까지 부패분자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불상사가 아니었소. 에베르는 당통과 또 다른 형태의 허무주의자였소. (중략)수구세력들에 대한 에베르의 과격한 언동은 모두 역사 허무주의의 소산에 불과했소. 과도하리만큼 집요하고 철저한 그들 일파의 무신론은 역사 허무주의와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소. 게다가 궁극적으로는 광화정이 반동 세력들에 의해 허물어질 수 밖에 없을 거라는 자포자기의 패배주의를 은폐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소. 나는 그들을 처단함으로써 이 공화국에 허무주의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조치한 죄밖에 없소.(중략). 그곳에 있어봤자 몇이겠는가! 그리고 그 중에서 너를 칭찬할 사람은 또 몇이겠는가! 완벽한 국가를 기대하지 말고 작은 진전에 대해서라도 항상 고마워하라!”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이성의 전망이야말로 신께서 예정해두신 궤도의 계시일 것입니다. 즉, 이성은 사람들에게 이식된 신의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신이 내려주신 이성의 눈으로 존재와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중략)그러나 신의 뜻을 가늠할 수 있는 지상의 척도는 이성의 눈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인간은 영화로운 조물주의 오묘하신 섭리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이를 부정하는 항간의 변설이 바로 허무주의입니다. 하지만 허무주의의 창궐에는 이성도 책임져야 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자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계몽주의적 이상을 통한 종교적 광신과 왕권신수설의 비판이 근자에 유행하는 무신론의 역사적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광신을 타파하려는 의지가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배척으로까지 증폭되고 확장된 작금의 추세는 대중 선동적인 몽매주의의 조화일 뿐 본디부터 이성이 향해가려 한 역사의 방향과는 아무 연관성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점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그 배면에는 살롱에서 저희들끼리 무신론을 새 시대의 오락거리로 노닥거린 구체제 귀족들의 권태와 방종이 감춰져 있습니다.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이들의 살롱에서 밤마다 치러진 연회의 정신적 향락을 북돋우기 위해 동원된 노리개에 불과합니다.(중략)구체제 귀족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들의 권태와 불안에서 해방되고자 모르핀 투약과도 같은 무신론의 처방에 매달리면서 그 처방의 약효로 눅진한 허무주의를 게워낸 데 지나지 않습니다.”

“살아서 죽고, 죽는 것으로 사는 일입니다. 영육을 뒤덮는 죽음의 그림자는 삶과 죽음이 대극임을 부정하는 징표일 것입니다.”

“방금전 당신이 대립시킨 불멸의 영혼과 한시적인 육신도 실은 범주화의 논리에 속하질 않습니까, 시민 엘레우시스?”
로베스피에르가 답한다.
“그래서 저는 그 대립을 영육으로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영육은 대립을 무화시키는 심연입니다.”
자라스트로가 묻는다.
“그 심연은 이성에 근거를 둔 존재입니까, 시민 엘레우시스?”
로베스피에르가 답한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바깥에는 이 지상에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하스트로가 묻는다.
“예컨대 신은 이성의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계몽주의자들과 이 시대의 무신론자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까닭은 그것이 이성의 바깥에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시민 엘레우시스?”
로베스피에르가 답한다.
“그래서 저는 이성의 최고 존재를 신성화하는 일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그들의 허무주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 존재가 영혼과 육신으로 쪼개져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영혼의 한시적인 거푸집일 뿐입니다. 영혼이 떠나면 육신은 용도를 다한 거푸집처럼 사그라집니다. 하지만 영혼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혼의 불멸과 불멸의 영혼을 동시에 믿습니다. 이 믿음에 반발한다면 그는 아마도 무신론자이거나 신의 죽음을 설파하고 다니는 허무주의자일 것입니다. 저는 무신론도, 허무주의도 배격합니다.”
자하스트로가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당신은 존재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자입니까, 시민 엘레우시스?”
로베스피에르가 답한다.
“둘 모두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죽은 몸으로서의 저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ㅇ낳는 자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자하스트로의 입이 달싹거린다.
“죽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시민 엘레우시스?”
로베스피에르가 답한다.
“저는 이미 죽은 몸입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생-쥐스트의 입이 이윽고 달싹거린다.
“저도 로베스피에르 시민 동지와 같은 생각입니다. 정작 우리를 버린 것은 상퀼로트들이 아닙니다. 피해갈 수 없는 공화정의 행로가 우리를 버린 것입니다.(중략).하지만 우리가 죽고 나서 혹여 저들에 의해 공화정의 명목이 유지된다고 해도 그 공화정은 더 이상 우리가 이루고자 염원해온 공화정이 아닐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 시민 동지의 말씀대로, 공화정에서는 오로지 공화정의 이념과 신조에 부합하는 시민들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공화정을 거부하는 자들은 추방되어야 마땅합니다. 나는 우리가 염원해오지 않은 반동과 퇴행의 공화정에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들이 원하는 공화정의 이념과 신조에 부합하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게 원하고 바라는 것은 자발적인 추방과 유형뿐입니다.”
이어 휠채어를 굴려 앞으로 나오며 쿠통도 말문을 연다.
“나또한 이 두 시민 동지와 생각이 같습니다. 반도의 잔당들에게 온정을 베푼 것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그때 다 죽여 없앴어야 했습니다.(중략) 하지만 당시에 우리가 그 법적 장치들로 무엇을 어쩔 수 있었다 한들 현재 상황이 크게 달라졌으리라는 생각 또한 들지 않는군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행의 적기가 언제쯤인지 알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설령 그 적기를 알았다 해도 우리만의 힘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되짚어보는 일은 정녕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가슴이 미어지는 회오로 남을지라도 차라리 그런 미련을 버립시다. 이승의 생에 대한 미련에서 그만 벗어납시다. 이제 우리 앞길에는 죽음의 축복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권세로 나는 생에 대한 맹목적인 긍정을 극복하고 싶습니다. 오로지 죽음만이 가장 질기고 도저한 항거의 몸짓일 수 있기 대문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장 굳건한 결속의 신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쿠통이 말을 맺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코피날이 격하게 소리친다.
“정말 다들 왜 이러시오! 누구보다 강경하고 급진적인 혁명 노선에 앞장서온 동지들이 이제 와서 그런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의 언사들로 우리를 현혹할 셈이오? 지금은 대혁명 발발 이후 가장 극렬하고 필사적인 투쟁을 다짐해야 할 때이지 그런 죽음의 안식 따위에나 투항해야할 시점이 아니란 말이오! 로베스피에르 시민 동지, 이 자리는 절대로 우리 산악파와 공화정의 무덤일 수 없소이다.(중략)”
(중략)
로베스피에르, 손에 든 권총으로 턱밑을 겨누려다 말고 이렇게 말한다.
“장군, 공화국에서는 어떠한 순교자도 있을 수 없소. 자크 루 신부 뿐만 아니라 당통도, 에베르도 순교자일 수 없소. 나는 장군이 나에 대해 순교자로 추앙해주길 원치 않소. 또한 자결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나의 죽음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선택일 수 밖에 없을 거요. 나는 나의 죽음을 자결 따위와 맞바꾸고 싶지 않소. 나는 자결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나의 죽음을 영원토록 간직하겠소.”
그러자 나폴레옹,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는다.
(피리 시청에서 포위당한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지들의 대화. 생 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의 최측근)

“덕성 없는 공포는 사악하고 공포 없는 덕성은 무력한 법이지. 인류의 압제자를 냉엄하게 응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요. 하지만 그들을 자비와 화합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순간, 자비와 화합의 덕성은 야합과 협잡으로 변질되고 말 뿐이오. 폭정의 가혹함은 오로지 그 가혹함만이 유일한 행동 원리에 불과하지만,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지반으로 딛고 있소. 그러니 내가 다시 태어나 이와 같은 역사의 길목과 마주한다 해도 나는 불가불 공포정치를 택할 수 밖에 없을 거요.”
그 말에 나폴레옹,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힘없이 웅얼거린다.
“그렇다면 제발 그런 자학으로 당신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모독하지 말아줘…”
(이 다음 바뵈프와 그 상퀼로트 세력은 정적이었던 장 바티스트 앙드레 아마르(에베르의 동지)와 정치적 동맹을 맺는다)

“허무주의는 영혼을 부정합니다.”

신정론, 사도 바울의 부패하지 않는 신과 부패하는 인간, 이성-영혼-부패하지않는 신, 진보에 대한 믿음.

  1. 프랑스 혁명 당시의 정파로 시기에 따라 다를 순 있지만 하층민 상퀼로트의 지지를 기반으로 상퀼로트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파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을 이끄는 거두 중 하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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