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흔과 박현찬이 함께 쓴 <붉은 까마귀>(나무를 심는 사람들,2023)는 2007년 출간된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를 리뉴얼한 책이다.
이 소설은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을 소재로 한 일종의 팩션 청소년 소설이자 글쓰기 방법론에 대한 소설적 탐구이기도 하다.
작가 설흔 소개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설흔과 박현찬, 두 사람이 함께 썼다. 두 소설가가 콜라보로 각 장을 맡아 한 권의 책이나 두 권으로 낸 소설은 봤지만, 이렇게 구분 없이 아예 한 권의 소설로 내는 것은 처음 본 것 같다.
작가 설흔은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2010년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로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수상하고 주로 청소년 소설을 써 왔다. 작가의 전작 <네 통의 편지>는 퇴계의 공부 방법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공저자 박현찬은 스토리로직의 대표이자 한겨레교육에서 글쓰기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경청》, 《원칙 있는 삶》, 《마중물》, 《작가의 책상》(역서) 등이 있다.
붉은 까마귀 줄거리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전작 <네 통의 편지>와 플롯이 너무나 유사해 조금 식상했다. 네 통의 편지는 주인공이 퇴계에게 제자로 입문해 글쓰기를 배우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연암 박지원에게 입문해 연암의 글쓰기 방법을 배운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이 소설은 <네 통의 편지>보다 플롯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주인공들이 배신하고, 그 배신을 통해 반성하고 성장한다는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지문’이다. 물론 가상의 인물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지문이 산 중에 머물고 있는 박지원을 다짜고짜 찾아가 제자로 삼아 달라고 하자, 연암은 한 가지 조건을 단다. 과거를 보지 않으면 제자로 받아 주겠다는 것. 박지원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지문은 급한 마음에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제자가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 시대에 과거를 통하지 않고 글쟁이로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지문의 아버지가 참 대단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그 당시 박지원은 문체반정으로 정조에게 찍혀서 반성문을 쓰네 마네 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아들의 장래를 맡기고, 심지어 앞으로 소설로 먹고사는 세상이 온다고도 했으니 말 다했다. ㅋ
아무튼 제자가 된 지문에게 박지원은 앞으로 공부법부터 바꾸라며 첫 번째 가르침을 준다.
“우선 <논어>를 천천히 읽게.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읽어야 하네. 그저 읽고 외우려 들지 말고 음미하고 생각하면서 읽게. 잘 아는 글자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네. 반드시 한 음 한 음을 바르게 읽게.”
– 본문 60쪽
그날 이후로 지문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논어>난 주야장천 읽었다. 며칠 후 박지원은 마침내 제자에게 글쓰기 과제를 준다. 주제는 ‘붉은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죄다 검은 색 뿐인데 붉은 색 까마귀에 대해 쓰라고? 하긴 세상엔 블랙 스완도 있다만.
지문은 또 몇 날 며칠 까마귀 관찰에 매달린다. 그러나 적오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대제학 김조순이 막내딸 초희를 데리고 박지원을 찾아온다. 지문은 가마를 탄 초희가 문을 조금 열었을 때 그녀의 머리 위로 그토록 찾아 헤맸던 붉은 까마귀들이 맴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지문은 스승이 내린 글쓰기 과제를 완수할 수 있었다. 지문이 쓴 글을 보고 기특하게 생각한 박지원이 글쓰기에 필요한 통찰에 대한 이치를 알려준다.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언젠가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 통찰의 순간이 오는 법, 네가 갑자기 깨달았다고 한 그 순간이니라. 통찰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반드시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걸을 일컬어 오(悟)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 본문 100쪽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문은 글쓰기에 정진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자꾸 김조순의 막내딸 초희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심부름 가서 만난 박제가의 제자 연수의 얼굴도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대제학 김조순이 과거에 응시하고 자기 밑에 들어오면 장래를 보장하겠다고 은근히 제안했던 말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만 해주면 초희를 그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하지 않았던까.
아무리 소설이지만 이건 좀 아니지 싶었다. 대제학 김조순이 뭐가 아쉬워서 정조에게 찍힌 박지원의 제자, 그것도 명문가의 자제가 아닌 한낱 서생에 불과한 지문을 빼내기 위해 장래를 보장하고 딸까지 주겠다고 몸이 단다는 말인가, 좀 웃었다. ㅋ
아무튼 소설은 지문이 초희와 결혼을 위해 과거를 보고 스승에게 배신을 때릴지 심각하게 갈등하는 구조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결말은 청소년 소설이니까 대충 감을 잡으시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설의 목적은 두 여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남자 이야기가 아니고, 권력을 탐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도 아니다. 연암이라는 인물을 통해 글쓰기를 배워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소설이니까 박지원의 글쓰기 수업에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고루함을 질색했던 박지원이 만약 제자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다면 왠지 논어를 읽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뇌피셜이지만, 논어니 맹자니 하는 것들을 그렇게 중시한 인물에게서 <열하일기> 같은 문장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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