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에서 20년 전의 그녀들을 만나기로 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좌석에 앉았다. 7시 48분. 뭐지 이 낯선 기분. 안전벨트가 없다니.
오송으로 바로 가는 기차가 매진이라 동대구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내 생애 첫 나 홀로 기차 환승이다. 주로 자동차로 이동하다보니 기차가 낯설다. 무지무지.
창원중앙역에서 동대구역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거리. 남편 말로는 동대구 역사가 좀 복잡하다고 하는데… 내린 승강장에서 바로 탈 수 있기를. 18호차 12A가 내 자리. 내 옆에는 나 같은 중년 여성이 먼저 앉아 있다. 어디서부터 출발했을까.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다. 진영에 정차했다가 출발.
날씨가 좋다. 파란 하늘에 어지럽게 흰 가닥같은 구름이 퍼져있고 창밖으로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풍경이 이어진다. 저수지에서 뿜어내는 아스라히 뿌연 안개가 몽환적이다.
이른 아침 기차를 탄 적이 있었던가. 나는 이 경험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눈여겨 바깥을 살핀다. 밀양역 정차 후 출발.
햇빛이 제 모습을 갖추고 말쑥하게 드러났다. 오늘 날씨는 걱정 없겠다.
드디어 동대구역. 차량을 연결한다고 예상시간보다 7~8분 늦게 정차했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내린 11번 승강장에서 그대로 타면 되어서 시간은 남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마음을 졸였는데, 초심자답게. 이번에는 1호차 9A, 끝에서 끝이다. 아침 기차역 풍경은 적당히 한산하다 싶으면서도 막상 기차를 타면 빈자리가 얼마 없다.
내가 집콕 생활을 하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바삐 움직였구나 싶다. 동대구역에서 오송역까지도 한 시간 남짓. SRT316호가 들어온다. 내 자리에 청년이 자고 있어서 내 옆자리인가 했더니 일어서서 나간다. 잠시 뒤 빨간 스웨터를 입은 중년 여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배정할 때 본인이 선택하지 않으면 개인정보를 활용해서 성별과 연령별로 배치하는건가.
그녀가 화장을 시작한다. 화장을 기차 안에서 하는 광경은 처음이다. 베이스부터 꼼꼼히. ㅎ 거울도 안 보고. 그녀는 나이든 여자들이 으레 그렇듯 대뜸 내게 말을 붙였다. 대전부터는 입석이라 한다. 같은 기차인데 좌석에서 입석으로 예약한 모양이다.
나는 재채기와 콧물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있다. 한결 낫다. 요즘은 비염을 달고 산다.친구들이 카톡으로 서로의 출발 일정을 공유하고 있다. 영원이는 서울, 윤희는 대전, 지안이는 세종서 오송으로 온다.
우리 넷은 참 다르다. 그중 내가 가장 이기적인 인간인 건 확실하다. 영원이와 윤희는 언제나 착하고 지안이는 합리적으로 착하다. 나? 나는 가끔 착한 척 한다.
오송역에서 서울서 내려온 영원이를 먼저 만났다. 잠시 후 세종시 사는 지안이가 아우디를 끌고 와서 식당으로 갔다. 비스트로앤이라는 이탈리아 식당이었는데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맛도 괜찮았다. 이탈리아 음식을 많이 좋아하지 않지만 먹음직스러운 데코도 맛을 거들었다. 커피도 맛있었다. 우리는 거의 1년 만에 만난 터라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주로 건강, 운동, 자식에 대한 것들이었다.
지안이는 몇 년 간 필라테스를 해서 보기 좋았고 윤희는 여전히 스트레스에 취약했고 영원이도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정곡을 찌르자면 우리는 늙어 가는 중이다. 식사를 마치고 세종수목원으로 향했다. 지안이는 모범적인 세종시민으로서 여기 지리에 밝았고 네비 없이 척척 차를 몰았다.
세종시 시내 구경은 첨이었는데 관공서 건물이 대번에 눈길을 끌었다. 밋밋한 디자인은 불허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듯 경관이 독특했다.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졌는데 여가부와 외교부, 국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청사가 세종시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심하게 계획된 도시는 아파트 이름도 우리말을 고집하는 거 같았다. 거리는 깨끗했고 곳곳에 공원 같은 산책하기 좋은 공간이 배치되어 있었다. 살기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안이는 재경부가 세종시에 내려와 있어서 시에 돈을 펑펑 써서 그렇다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국립세종수목원이 정확한 명칭. 낮에는 초가을같은 열기를 품고 있었다. 반팔 차림의 관람객들이 자주 눈에 띄었고 우리도 외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녔다. 수목원은 10년 남짓 되어서인지 아니면 컨셉인지 울창한 맛은 없었다.
군데군데 야외 포토존을 잘 꾸며 놓았다. 사진을 잘 찍으면 한국이 아니라 유럽 어디처럼 보이는 풍경이 눈요기가 되었다. 진주수목원을 생각하고 갔더니 그 격차가 좀 컸다.
암튼 나는 울창한 숲을 조금은 기대했던 것이다.
지안이가 차에 있는 양산을 빌려주어 적당히 햇빛을 피할 수 있었다. 햇살이 따가워 맨 눈으로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수목원을 나와 국립세종도서관에 갔다. 책이 있는 곳이라면 한 번쯤 둘러봐야겠다는 생각. 대통령기록관 옆에 차를 세웠다. 그렇다. 세월호 사건 때 문제의 그 기록관을 내 눈으로 보았다.
세종호수공원을 지나 도서관에 도착하였다. 국립이라 그런가 건물 규모도 컸고 책도 엄청 많았다. 검색해보니 100만 책(점)을 소장하고 있단다. 주말이라 그런지 이용자가 많았다. 일반자료실 테이블에는 여느 도서관과 다름없이 개인 학습자들이 많았다. 자료실 밖에는 널찍한 소파들이 널려 있었는데 사람들이 드러누워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휴게실에 있는 자판기 음료수를 하나씩 물고 내년 여행 계획을 미리 짰다. 야무진 지안이의 제안이었다. 5월 24~25일 창원에 내려오는 일정을 잡고 기차표를 미리 예매하고 숙소는 온돌 4인실로 하자는 등의 이야기들이 오갔다. 어쩌면 말로만 하고 흐지부지 끝나지 않게 야무진 지안이가 단도리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모임이 굴러 가는 법이다.
지안이의 아우디를 타고 다시 오송역. 나는 영원이와 대합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광판에서 탑승 승강장을 확인하고 영원이와 헤어졌다. 오송역은 비교적 단순해서 별 무리 없이 승강장을 찾았다. 다만 마산 방면과 포항 방면으로 향하는 열차가 같은 시각에 도착한다는 게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마산 가는 기차가 먼저 도착했고 기차에 붉은 빛으로 마산이라고 표시돼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기차에 올랐다. 일반실이 없어서 특실로 예매했는데 A석, B-C석 형태. 코를 엄청 고는 푸짐한 청년이 뒤쪽에 있어서 귀에 거슬렸는데 다들 불만 없이 잘 견디고 있어서 별 수 없이 나도 견뎠다.
내년 5월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여행 일정은 고정해두어야겠다. 20대에 직장 생활을 함께했던 우리는 이제 50대가 되어 다시 만났다. 직장을 인연으로 만났지만 직장 얘기는 하지 않았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 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차고 넘쳤다. 각자의 고민을 안고 내일을 살아가겠지만 여행의 기억을 잘 간직했다가 힘들 즈음 슬며시 떠올리고 기운 내서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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