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 공주의 사랑과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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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은 세월이 쌓일수록 사랑을 받는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입니다. 앤 공주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오드리 헵번은 여배우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들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미녀를 넘어 세기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데뷔작이나 다름없었던 <로마의 휴일>(1953)을 찍은 후, 연이어 <사브리나>(1954)로 다시 한번 사브리나 스타일이라는 선풍을 일으키며 그녀 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습니다. 스물네 살 때 이 영화를 촬영했으니 그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매우 운 좋은 배우였습니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는 스토리가 아주 간결하면서도 동화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귀한 신분의 앤 공주가 남몰래 아주 평범한 남자를 하루 동안 만나 데이트를 즐긴다는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클리셰가 되었고, 이후 수많은 드라마에서 오마주 되었습니다.

로마의 휴일 줄거리

로마에 온 앤 공주

마음씨 착한 앤 공주(오드리 헵번 분)는 영국 순방을 마치고 로마에 왔습니다. 우리들의 주인공 앤 공주가 마음씨가 착한지 어떻게 아냐고요? 영화 시작과 함께 끝이 안 보이는 영접 행렬에도 불구하고 앤 궁주가 우아한 자태로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을 다해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는 시퀀스로 앤 공주가 영국 순방 일정을 끝내고 로마에서의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기품 있는 공주의 모습을 보였다는 뉴스릴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앤이 어느 나라 공주인지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유럽에서 온 공주로만 소개합니다.

특히 앤 공주가 영접을 하면서 발가락이 얼마나 아팠는지 왼쪽 구두를 벗고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장면은 짠하기도 합니다. 하얀 벨라인 드레스 안에서 앤 공주가 구두를 찾아 헤매는 장면은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암시합니다. 짠하면서도 코믹스러운 분위기로 서스펜스를 끌고 가겠다는 것이 감독의 의도입니다.

침실에서

고단한 일정을 끝내고 드디어 침실입니다. 내일도 일정이 빡빡하기만 합니다. 나이 어린 앤공주가 좋아할 만한 일정은 1도 없습니다. 그녀는 의장대 사열을 하고, 무역 증진을 위해 공장 방문을 하고 연설을 해야 합니다. 마침내 앤 공주는 유모인 백작 부인에게 울먹거리며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투정을 보리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에서 아기 같은 귀여움이 느껴집니다.

앤 공주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중에 실신하자, 주치의는 수면제와 안정제를 주사합니다. 앤 공주가 불을 켜고 자도 되겠느냐고 묻자, 주치의는 잠시라도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된다며 동의합니다.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앤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랄까요. 앤 공주는 엄격한 의전은 기본이고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하나하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앤 공주는 창밖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파티 소리에 호기심으로 귀가 솔깃해집니다.

바깥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날 것 같은 풍경을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앤 공주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합니다.

공주의 탈출

아, 온실 속의 화초 같았던 연약한 앤 공주가 창문을 몰래 빠져나갈 시도를 하다니! 앤 공주의 어린애 같은 시도는 어렵사리, 그러나 운 좋게도 성공합니다. 드디어 수행원 없이 로마의 밤 거리를 홀로 활보하는 오드리 헵번의 표정에는 말할 수 없는 활기와 생기가 넘쳐납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대기를 마치 처음으로 맛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앤공주가 창문을 넘어 탈출을 시도할 때부터 그녀가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로마의 밤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때는 수면제 주사를 맞았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앤 공주는 로마 길거리에서 그만 잠에 빠져 들고 맙니다.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의 만남

그 시각, 동료들과 카드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부르던 기자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의 눈에 길거리에서 잠든 앤 공주가 들어옵니다. 수면제의 약효가 번지고 있었던 터라 조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깨워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택시 기사가 그녀를 바라보는 음흉한 눈빛은 관객들을 더욱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앤공주와 조의 만남
앤공주와 조의 만남

시나리오를 보면 작가 지망생들이 공부를 해도 좋을 정도로 아주 간결한 라인 위로 오밀조밀한 서스팬스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들을 걱정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소소한 해프닝으로 웃음 짓게 하면서도 종국에 가서는 긴 여운을 남기게 합니다.

조가 길거리에서 잠든 앤 공주를 발견했을 때, 그녀가 앤 공주인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일 11시 45분에 앤 공주를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었던 그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결에 조에게 시중을 들라는 앤공주
잠결에 조에게 시중을 들라는 앤 공주

그러길래 앤 공주를 그의 아파트로 데려가 난폭하게도 그녀를 소파에 내동댕이를 쳐 소파에서 잠자게 합니다.

완벽한 시나리오

관객들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데 정작 배우는 그 상황을 모르는 걸 시나리오 작법서에서는 ‘누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누설은 로마의 휴일 곳곳에서 활용되며 관객들의 관심을 끌어들여 주인공과 함께 행동하는 힘을 발휘합니다.

다음 날 12시에 눈을 뜬 조 브래들리 기자는 화들짝 놀라 신문사로 달려가 사장에게 앤공주를 인터뷰하고 왔다며 눙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키득거리지 않을 관객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제 상황은 정반대가 됩니다. 신문사에서 앤 공주의 사진을 보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잠자고 있는 여인이 바로 앤 공주라는 사실을 안 조 브래들리는 속으로 특종을 잡았다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잠에서 깨어난 앤 공주는 여전히 조가 자신의 신분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관객과 조는 앤 공주를 알고 있고, 앤 공주만 그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는 미묘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앤 공주는 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편하게 길을 나섭니다. 로마의 거리로! 조가 자신의 뒤를 밟을 것이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경쾌하게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조는 특종을 낚을 생각만을 하며 그녀의 뒤를 살금살금 뒤따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봅니다. 조각같이 잘생기고 믿음직스럽게 생긴 그레고리 펙은 대배우답게 속물근성 기자 역도 능글맞게 소화해 냈습니다.

인생에서 즐거움이란

태어나고 처음 거리의 길을 홀로 걸어 다녔을 앤 공주는 미용실 창문에 붙은 단발머리 사진을 보고 미용사에게 쇼트커트를 해 달라고 합니다. 이 남자 미용사의 반응도 웃깁니다. 그 역시 상대가 공주 인지도 몰랐지만 탐스러운 긴 머리를 자르는 것이 더 비통했던 모양입니다.

“아우트! 아우트!”를 외치며 미용사가 커트한 앤 공주의 헤어스타일은 그 유명한 헵번스타일이 됩니다.

숏컷을 하고 미용실을 나오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뭐랄까요. 번잡한 거리에 갑자기 요정이 상큼하게 나타나 순식간에 공기를 바꾸어 놓은 듯한 풍경이랄까요.

로마의 휴일을 함께 하자는 조
로마의 휴일을 함께 하자는 조

기자 조는 앤 공주가 미용실을 나와 젤라토를 사 먹고 스페인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 우연인 척 접근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스쿠터를 타고 로마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은 영화사에 오래 남을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스쿠트를 달리는 앤공주
스쿠트를 달리는 앤공주

로마에 대한 어떤 홍보 영상도 <로마의 휴일>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시내의 데이트 코스를 경쾌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조가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며 앤 공주를 놀라게 하는 장면은 아마도 수많은 연인들이 따라 했을 겁니다. 앤 공주가 살아있는 한 평생 로마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로마를 다녀오신 분들도 아마 그렇겠지요.

로마에서 싹트는 사랑의 감정

공주가 사라진 뒤 왕가는 발칵 뒤집히고 비밀 요원들이 하여금 공주를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비밀 요원들은 생트 앤레로 유람선에서 선상 파티를 즐기는 앤 공주를 마침내 발견합니다.

앤과 조는 공주를 모셔가려는 비밀요원들을 난장판 끝에 따돌리고 강물로 뛰어듭니다. 앤 공주는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한 표정입니다. 그 표정을 본 조는 자신의 속물근성, 특종만을 낚으려 했던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힘은 역시 위대한가 봅니다.

남녀가 작은 위기를 힘을 합쳐 극복하면 대개 사랑의 감정이 급속도로 싹틉니다. 앤 공주는 첫 키스를 격렬하게 조와 나눕니다. 조의 아파트에서 옷을 말린 앤 공주는 그러나,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별의 순간

조와 앤 공주가 헤어지기 전 나누는 대화는 이 영화의 명대사가 되고 명장면이 되었습니다. 애틋한 이별의 전형. 밤이 깊어가는 골목에서 앤 공주는 조의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작별 인사를 합니다.

“이제 떠나야겠어요. 저 코너로 돌아가면 당신은 차를 타고 가세요. 코너에서 날 보지 마세요. 제가 떠나는 대로 그냥 차를 타고 떠나세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조는 짧게 “좋아요.”라고만 답합니다. 앤 공주가 다시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하죠. 아무 말도 생각 안 나요.”라고 울먹거리자 조도 침통하게 “애쓰지 마요.”라고 토닥거립니다.

둘은 다시 격렬한 작별 키스를 나누며 전혀 다른 두 세계로 가야만 하는 자들의 영원한 이별을 실감합니다. 

로마의 휴일 결말(스포일러)

이 영화는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의 구조를 잘 따르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모험을 마친 후에 어른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서사 구조입니다. 

단 하루 사이에 앤 공주는 어린애 같은 공주에서 위엄이 스린 공주의 아우라를 보여줍니다. 공주를 보필하는 공작이 은근하게 나무라자 “가족과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고 있었다면 오늘 밤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니면 영원히. 이제 그만, 모두 물러 가세요.”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앤 공주는 기자단과 마지막으로 회견을 합니다. 기자단에서 조 블래들리와 사진기사 어빙을 발견한 앤공주는 그제서야 그렇게 즐거운 로마의 휴일을 보냈던 조가 기자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미 어른이 된 앤공주는 평정심을 되찾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인간관계에 믿음이 있듯이 국제관계도 다 잘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조와 어빙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죠.

이별의 순간
이별의 순간

어빙은 특종을 바라며 몰래 찍었던 그 사진들을 마지막 선물로 앤 공주에게 줍니다. 앤은 기자단의 조 브래들리와 눈을 가만히 맞추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섭니다. 조 역시 앤이 떠난 빈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하다 자신의 세계로 걸어가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현실은 팍팍하고 그래서 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영화 속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면 하루쯤 로마에서 휴일을 보내고 싶을 겁니다. 앤 공주는 단 하루의 일탈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 역시 공주와의 달콤한 만남을 평생 추억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로마에서 보냈던 단 하루의 휴일만이 그들 인생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순간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홀한 순간은 너무 짧고 따분함은 너무 길다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오드리 헵번 출연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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