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우 작가의 첫 장편 소설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교보문고, 2024)는 타임 루프1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기획작이다.
줄거리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의 주인공 진태가 처한 상황은 아주 복잡하고 가장 어려운 인생 한 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7년 전 가을, 초등학교 동창들과 덕유산에 등산을 갔다가 그만 낙상을 당해 사망했으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아버지는 벌써 1년 가까이 식물인간 상태이다.
그는 업계 규모 5위의 제지회사 기획실에 입사해 6년 넘게 나름 성실히 일해 왔다고 자부했지만 동료보다 승진도 늦었고, 과장으로부터는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희망 퇴직을 권고 받고 있는 처지다.
무엇보다 그는 결혼하고 6년 4개월 만에 매사 올곧기 만한 아내에게 진저리가 나 이혼을 결심하고 통보했으나 아내는 이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는 광복절 오후에 아내와 언쟁을 벌였는데, 아내의 조리 있는 대꾸에 한순간 말문이 막히자 홧김에 벽을 치는 바람에 마취 수술을 받고 왼쪽 손목에 깁스까지 해야 했다.
동생 진수는 그럴듯한 직장 없이 자칭 아마추어 사교 춤 댄서이다. 그는 짝사랑하던 댄서가 가을에 있을 댄스 경연대회에 참가할 파트너로 다른 놈을 택하자 수치심과 함께 세상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느끼고는 한강 대교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했으나 구급대가 그를 구출한다.
막내 동생 해민은 올해 나이가 스물여섯이다. 그녀는 선배 언니가 운영자로 있는 BL 웹툰 사이트에 SF 웹툰을 올리고 있다. 그녀는 선배 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가슴이 뛰지만 선배 언니가 이성애자임을 알게 되고 실망한다.
이런 처지에 빠져있었던 삼남매가 병원의 연락을 받고 모인 가운데, 아버지는 길게 마른 하품을 하고 숨을 거두었다.
삼남매는 허둥지둥 얼렁뚱땅 장례를 치르고 수원 본가로 가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진태는 아버지의 진열장에서 25년 산 시바스리갈을 발견하고 귀한 양주라며 동생들과 나눠 마시고 기분이 알딸딸해진다.
그 와중에 해민은 족히 40년은 묵은 것 같은 스피커 일체형의 조악한 턴테이블과 LP판 하나를 발견했다. 검은 판 위에 허연 곰팡이들이 점점이 앉아 있었는데, 어찌 보면 그게 꼭 나선 은하처럼 보였다.
LP판을 틀자, 상당히 몽환적 분위기의 재즈 음악인 아랑후에스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삼남매에게는 토요명화 앞 대가리에 나오는 시그널 음악으로 기억되는 곡이었다. 그런데 워낙 오래된 턴테이블과 LP판이라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음악 소리가 기괴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고장 났나?” 해민이 꿍 소리를 내며 허리를 세우고 엉금엉금 턴테이블 쪽으로 기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툭, 레코드 바늘이 위로 들리며 세상이 캄캄해졌다.(중략)
치직, 레코드 판에 바늘이 닿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다시 환해지면서 맨 처음에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중략)
그때 다시 툭,하고 판이 튀며 세상이 또 캄캄해졌다.(38쪽)
다음 날 아침 오전 7시 30분, 진태는 자기 집 안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분명 본가에서 동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떻게 집에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은 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왼손에 깁스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거실로 나왔을 때 8월 5일 날 보도되었던 칠레의 산호세 광산이 붕괴되어 작업 중이던 광부들이 모두 메몰됐다는 뉴스가 다시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8월 23일이어야 할 세상이 18일 전, 그러니까 8월 5일로 되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이 삼남매에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타임 루프가 찾아온 것이다.
삼남매가 다시 모였다. 막내 동생 해민이 먼저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해민은 딸꾹질을 하듯 시공 연속체의 판이 튀는 바람에 세상이 갑자기 10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가 버리는 이야기를 담은 커트 보니것의 소설 <타임 퀘이크>을 인용하며 아버지의 레코드판이 우주와 똑 같은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보는 관점에 따라 우주란 회전하는 거대한 천체야, 그치? 그리고 어제 아빠 레코드판 기억나? 곰팡이가 꼭 나선 은하 모양이었잖아. 슬슬 감이 오지? 자, 레코드판이 돈다. 즉 우주가 돈다. 그러다가 딱! 판이 튄 거야. 우주가 튄 거라고! 그래서 과거로 돌아온 거라고!”(45쪽)
아무튼 18일의 시간 되돌림으로 인하여 진태는 다시 한번 아내와 이혼 논쟁을 벌여야 했으며 조심을 했으나 다시 왼손을 다쳐 깁스를 하여야 했다. 진수 역시 댄서를 짝사랑하다 자살을 하여야 했고 구급대에 구출되는 일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아버지는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숨을 거두었으며, 삼남매는 거기에 맞추어 다시 한번 더 아버지 장례를 치뤄야 했고 본가에 모여 시바스리갈을 마시며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에서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삼남매의 시간은 다시 8월 23일 아닌 8월 5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자, 삼남매는 지쳐버리고 말았다. 이혼 논쟁을 다시 하고 자살 시도를 하고 아버지의 장례를 다시 치르는 일이 생지옥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타임 루프를 빠져나오느냐가 삼남매의 공통된 목표가 되었다. 삼남매는 장례를 허술하게 치루어 아버지가 노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하고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르면서 반성도 하고 아버지와 자신들의 삶도 돌아보지만 결과는 매번 똑 같았다.
그들은 과연 타임 루프를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시작되니까 이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은 책을 읽은 후 다시 찾아와 주시면 감사하겠다.
결말(스포일러)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에서 삼남매는 도무지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타임 루프를 멈추게 할 단서를 의사의 말과 아버지의 유품인 일기장에서 찾게 된다. 사경을 헤매던 아버지가 ‘에이미’를 애타게 찾더라는 의사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삼남매가 읽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아버지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학을 진학하고 외교관을 꿈꾸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자진 입대했다. 군대에서 에이미라는 여성과 펜팔을 하면서 둘은 결혼에 이를 만큼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복학 후에도 아버지는 외무고시에 낙방을 계속했고, 그들이 꿈꾸었던 결혼은 두 집안에게 허락 받지 못하는 비극적 사랑이 되었다. 아버지는 에이미와 도망을 가기 위해 YMCA 회관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절망에 빠진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기억은 이 시점에 결박된 것처럼 보였으나 또 다른 일기장에는 그 후의 사연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에이미의 지극한 순애보는 결국 모든 난관을 뚫고 결혼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외교관을 포기하고 취업했으며 에이미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놀랍게도 에이미는 진태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안 삼남매는 아버지가 마지막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YMCA 사건, 그 뒤로 쭉 이어지는 이야기를 아버지가 회상할 수 있도록 필사의 노력을 한다. 일기장과 편지들을 낭독하기도 하고 삼남매가 마치 연극 배우처럼 재연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그 뒤의 이야기들을 기억해 내기라도 한 듯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 날 아침, 삼남매는 마침내 8월 23일 이라는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에필로그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의 초고는 삼남매가 꾸역꾸역 에이미를 찾아내 아버지와 마주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이 제자리를 되찾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몹시 별로인 지인의 반응을 보고서 이런 이야기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글쎄, 어느 쪽이 더 나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이 소설은 큰 카테고리가 가족 소설이라 어느 쪽으로 가든 작가가 의도했던 목적은 쉽게 달성할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근데, 재미는 역시 장르 소설 쪽이 아닌가 한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타임 루프의 반복 속에서도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자아 성찰과 가족의 가치를 점점 더 깊이 있게 드러내는데 성공했다.
인생에서 특정한 기간을, 그것도 이혼이나 죽음과 맞닥뜨린 상당히 중대한 기간을 이 소설처럼 여러 번 반복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삶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그것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인생의 여러 단면들을 조금 더 깊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읽어보면 좀 웃기고 재미있다. 경우에 따라선 히죽거리며 배꼽도 잡아야 한다. 또 뭔가 유치하면서도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 인생을 살아야 되나, 하는 좀 철학적인 생각들도 하게 만든다. 작가 이천우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2024년 출간 소설
- 타임 루프는 특정한 조건이 해결될 때까지 특정 시간대가 고리(Loop)처럼 계속 반복되는 현상을 뜻한다. 보통 타임 루프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등장 인물들은 특정 시간대에 갇혀 똑 같거나 비슷한 일을 매회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회귀물이 1회차인데 반해 루프물은 특정 조건이 해결되지 않는 한 무한 반복되는 차이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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