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침몰-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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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일본침몰은 일본 SF작가 고마츠 사쿄의 원작 소설 일본침몰을 기반으로 제작된 미디어믹스 중 하나다.
제목 그대로 일본열도가 침몰하는 재난상황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재난에서 살아남는 건? 개인, 가족, 집단

재난 속에서 인물들은 기존 도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가까운 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한다. 생존을 위해서 남의 소유물을 멋대로 강탈하고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에겐 용서없이 굴어야한다.

이런 비도덕적인 행동들은 단순히 죄책감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내면의 가치관까지 파괴한다. 인간을 인간처럼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의 종류가 적다. 생존을 위할수록 살아야할 이유를 스스로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살아남아야할 이유를 찾는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하나?

“이 때를 위해서였던거야!” 등장인물들이 최후에 뱉는 말이다.

마치 샨 시티처럼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배정된 역할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이류를 위해 헌신한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단역들을 포함해서 등장인물들이 발견하는 이유는 세 종류다.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단체를 위해.

이 애니메이션에서 악역은 모두 나를 위하는 사람들이다. 주인공 일행이 취약할 때를 노려 마수를 뻗치는 단역, 지진으로 샨 시티가 패닉에 빠졌을 때 금괴를 털어가려는 단역, 그리고 샨 시티를 탈출하는 주인공 일행의 차를 빼앗으려는 단역 등등.

이들은 남이 약해졌을 때를 노려 폭력을 행사해 원하는 것을 빼앗으려 든다.

반면 그런 이들과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이 샨 시티의 마더, 카나에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찾아낸 살아남아야할 이유는 자기 자신 또는 주변의 가까운 인간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카나에는 세계와 싸우고 있다.

카나에는 인생실패자들에게도 각자의 역할을 줄 수 있는 집단을 만든다. 각자에게 역할을 주고 소속감과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 있다는 충실감을 준다. 모두가 자기 주변을 챙기는 데에 급급할 때 카나에는 유일하게 이상적인 세상을 계획하고 제시하는 인물이다.

물론 샨 시티 또한 마냥 긍정적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애초에 이 곳의 행복의 근간은 마약이다. 오노데라의 예언을 전하는 아유무에게 야유하는 신도들은 일본이 침몰하고 있는데 마약같은 허상에 취해 현실을 잊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마지막에 가서 갑작스레 벌어지는 금괴쟁탈전은 이렇게 평화로워보이는 유토피아가 이기주의자들의 폭력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듯 하다.

결국 모든 재난이 지나간 후에 주인공 일행이 전진할 수 있는 건 그들을 도와준 유사-가족들 덕분이다. 고의 할아버지 격이었던 히카타는 폭도로 변한 샨 시티의 신도들로부터 주인공 일행을 지켜주었다. 주인공 일행을 살리기 위한 부모 형제 등등의 희생을 겪으며 주인공 일행은 살아가는 의지같은 뭔가를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결국 국가도 샨 시티도 파괴된 뒤에 진정으로 남은 건 가족이었고 마지막에 아유무에게 뭔가를 남기는 데에 성공한 것도 어머니 마리였다.

하지만 가족애가 성취하지 못하는 것도 애니메이션은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카나에와 주인공의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어른들은 솔직히 좀 믿음직스럽지가 못하다. 가령 나나미와 아유무의 엄마 마리를 보자.

그들이 주인공일행을 이끌 무렵은 한창 재난이 쏟아져 상황이 힘들어질 때다.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주인공 일행을 전진시킨다. 그러나 온갖 고난과 역경을 돌파한 뒤에도 일행들은 괴로운 표정 일색이다.

마리는 홑몸으로 일행을 책임져야하는 부담감에 짓눌려 주인공의 마음을 돌볼 여력이 없다. 나나미는 히키코모리 고가를 헤드폰 밖의 세계와 마주하게 하려하지만 애매모호하게 끝난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살아남아야할 이유를 설득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아유무, 고가의 살아남으려는 노력도 수동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일행들이 처음으로 얼굴이 피게 되는 곳이 카나에의 샨 시티다.

샨 시티는 이들에게 단순히 식량 등을 제공한 게 아니라 일상을 제공해주었다. 이 재난 시에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놀랍지만 그걸 듣자마자 곧장 고에게 학교에 가라고 하는 마리의 반응은 놀랍다 못해 웃기다. 물론 아이의 정신건강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치이긴 하나 마리 자신도 일상에 돌아가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고가와 마리는 대마를 수확하는 일에 자원해 뿌듯한 마음으로 샨 시티의 행복을 위한 노동에 정진한다.

가족보다 더 큰 단위의 집단을 생각하지 않는 한 미래를 생각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가족애는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집단이 무너졌을 때 이들을 지킨 건 가족이었다. 히카타가 고를 위협하는 신도들을 용맹하게 쏴죽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건 이기주의자들이 자신을 지킨 것과 같은 힘이기도 할 것이다. 가족애도 이기주의도 팔이 안쪽으로 굽는,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이 애니메이션의 특이한 점은, 어찌보면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진 카나에가 전혀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을 위하는 사람도 가족을 위하는 사람도 폭력을 휘두른다. 하지만 집단을 위하는 카나에만은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집단의 어두운 일면을 이야기할 때 흔히 있을 법한 비밀경찰같은 짓을 하지 않고 카나에는 무저항으로 파멸을 맞이한다. 그래서 샨 시티의 최후는 더욱 아름답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또는 남을 살리기 위해 서로를 죽였고 이상향을 무너뜨렸다. 그런 인식이 애니메이션에 깔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화에선 열도 침몰 후 성장한 아유무와 고 등이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땅을 잃은 일본인들은 서로 네트워크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를 멀리서 관전하고 있다.

일본 섬을 잃음으로써 오히려 혈통국적 따위를 초월한 자아실현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이들도 그 날 이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고. 가까운 인간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을 저버리는 우리들은 다시는 한 자리에 모이고 싶지 않은 인간들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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