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장은진의 장편소설 <부끄러움의 시대>(자음과모음, 2024)는 태생적으로 부끄러움을 아주 심하게 타는 아버지를 둔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줄거리
<부끄러움의 시대>는 주인공 강한해의 1인칭 소설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는 변곡점이 거의 없이 그대로 바다까지 이른다. 하여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소설적인 어떤 사건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지나친 평이함으로 지루해 할 수도 있다.
미혼 청년인 강한해는 수제 우산 가게를 하고 있다. 그는 호텔 청소부로 일하는 아버지와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역시 호텔 청소부였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사망했다.
<부끄러움의 시대>에서 사건이라면 태생적으로 부끄러움을 타고난 아버지 존재, 그 자체이다. 작가는 강한해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은 얼굴 붉어짐으로 먼저 드러난다. 신이 인간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든 이유는 감정을 드러나게 해 그 사람이 규칙을 어겼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는 글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빨간 얼굴은 나쁜 생각이나 감정에 의해 일어난 반응이 아이라서 아버지가 도덕적이지 않은 일을 저지른 신호가 되지 않는다.(중략)
붉은 얼굴은 겸손에서 오는 반항도 아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 오로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라는 단순한 불안으로부터 기인한다. 타인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사람. 일종의 사회 공포증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하면 아버지의 머릿속은 어김없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타들어 갈 듯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라도 하면 당장 죽을 것 같았다.”(61쪽)
그러니까 한해 아버지의 부끄러움은 자신이 규칙을 어기거나 잘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만나기만 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태생적이고 기질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한 해의 아버지는 운 좋게도 스무 살부터 호텔 청소부가 될 수 있었다.
호텔 청소부 J씨의 말에 의하면, 호텔 청소부는 절대 고객의 눈에 띄어서도 고객과 마주쳐서도 고객에게 청소하는 모습을 들켜서도 보여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즉, 호텔 청소부는 유령처럼 고객이 없는 틈에 얼른 청소를 끝내고 객실을 빠져나오는 것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J씨는 40년 동안 일한 청소부 일자리를 한해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유령이 돼야 해. 그게 곧 너의 실력을 입증하는 거야.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 (8쪽)
그러니 강해 아버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천직을 얻은 셈이었다. 강해는 그후 유령처럼 일하게 된 아버지의 일생을 담담한 문체로 독자에게 들여준다.
그 호텔 1901호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장기 투숙객이 들어오면서 잔잔하게 흐르던 이야기의 강물이 아주 약간 출렁인다.
강해 아버지가 같은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던 어머니를 좋아하고 결혼까지 이르는 과정과 누나가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이혼하게 된 경위들,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었던 장기 투숙객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강해는 명품 우산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 그는 스승님의 철학대로 디자인이 같은 우산은 단 세 개만 만든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심하게 망가진 우산을 들고 그의 가게에 찾아와 똑같은 우산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강해는 그녀에게 “이봐요.” 하고 불러 세우며 자신은 같은 우산을 절대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녀는 도무지 막무가내였고 그는 할 수 없이 아주 심하게 망가져 버린 그 우산을 수리하기로 한다.
강해가 어렵사리 그 우산을 수리하는 동안 “이봐요” 씨와 그 우산에 얽힌 인연이 점차 드러나고 그에 따라 둘은 자연스럽게 연애 감정도 싹트기 시작한다.
독후감
장은진은 작가의 말에서 “견디고 버티기. 복잡한 삶은 단순하게도 그것의 반복을 통해 이어가고, 삶이 내놓는 결과물들은 그것으로 인해 탄생한다.”고 썼다.
강해의 아버지는 타고난 부끄러움을 견디고 버티며 살았고, 강해 또한 견디고 버티며 대량 생산되는 공산품의 범람 속에서 세상에 하나 뿐인 명품 수제 우산을 만드는 일을 계속 한다. 그 견디고 버팀에 의해 등장 인물들의 인연이 이어지고 꿈과 사랑으로 나아간다.
차분하고 담담한 문체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부끄러움의 시대>를 읽으며 소소한 위안과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뭔가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어조가 갑자기 드러나는 몇몇 대목은 이 소설이 가진 한계이자 흠이다. 예컨대, 이런 구절들이 그렇다.
“그 뒤에 벌어질 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에도 반성과 처벌은 없을 것이고,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어서 앞으로도 이런 사회적 참사는 무한히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 바뀌거나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 부끄러운 시대를 어떻게든 끝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사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반복해서 잃을 것이다.”(193쪽~194쪽)
나는 제목이 왜 <부끄러움의 시대>일까, 의아해 하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그 이유는 위의 구절들이 있는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명확해졌다.
소설의 주제가 ‘강해 아버지의 기질적인 부끄러움’에서 ‘부끄러운 시대’로 갑자기 비약 되었다. 주제가 갑자기 튀어버리니까 이질감이 든다. 부끄러운 시대이지만 부끄러워하지 말고 버티고 견디라고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이다.
시대의 부끄러움을 개인적인 견디고 버티기 차원으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과업에는 견디고 버티기가 필수적인 미덕이겠지만 시대적인 과업에는 분노와 사회적인 연대가 선행되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제명을 차라리 ‘유령’ 정도로 했으면 좋았을 법했다. <부끄러움의 시대>가 사회 문제를 다룬 소설로 보이기 보다 등장 인물들의 성정을 주로 다룬 이야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무엇보다 등장 인물들이 한결 같이 작위적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가 뭘까? 강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처럼 보이고 주인공 강해와 ‘이봐요’ 씨도 그런 유형으로 느껴진다.
현실에서 그러한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까닭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흠결이 없는 인간은 입체적인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그만 납작해지기 일쑤이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이는 가족 소설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작가의 욕심이 크게 작용한 탓이 아닐까 싶다. 이런 소설들은 교훈적인 감동은 있을 지 몰라도 거기에 비례해서 소설적인 재미는 크게 반감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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