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낮은 인플레이션은 좋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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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 경제학 저작들을 많이 써왔다. 여기서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 안세민 옮김, 도서출판 부키, 2010)를 소개한다.

책의 주요 내용

<사다리 걷어차기>(2002)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장하준은 개발도상국 경제에 초점을 맞춘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10)를 출간하며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신화의 허상을 깨뜨리는 데 앞장섰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장에 관여하는 것을 일체 삼가야 한다. 기본적으로 시장에 참가하는 주체는 모두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부자, 특히 정부는 이들의 행동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장하준은 우리들에게 그 자유시장 자본주의자들이 말하지 않는 진실을 이야기 하면서, 독자들이 ‘전문가’들이 지지하는 이론들에 도전하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받아들이는 ‘실증적’ 자료들에 의문을 제기하기를 촉구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책표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책표지

흔히 신자유주의 정책 패키지로 알려진 자유시장 정책 패키지의 일련의 정책들은 낮은 인플레이션, 자유로운 자본 이동, 그리고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미사여구로 표현되는 높은 고용 불안정성 등을 중시한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어떤 목적으로 입안되는지 풍부한 사례를 들어가며 하나하나 반박한다.

그는 인도보다 50배 높은 임금을 받는 스웨덴 택시 기사의 사례를 들면서, 자유시장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유 시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보수를 받는다는 신화 또한 허상이라고 말한다.

같은 일을 하는 인도 사람에 비해 생산성이 높지 않은 스웨덴의 노동 인력이 50배나 높은 임금을 받게 된 것은 단지 이민 정책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인도 택시 기사들이 스웨덴 택시 기사들보다 50배나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과거 인터넷 열풍과 현재의 AI

장하준은 나아가 인터넷 혁명이나 교육 열풍도 근거 없는 ‘착시 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환상에 갇히면 자원 분배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에 대한 저자의 논증은 실증적이다. 인터넷보다 전기, 수도, 가전제품이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주장이다.

…전보의 발명으로 대서양을 건너 소식을 전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이 2주일에서 7~8분으로 줄었으니 2500배가 빨라진 셈이다.
…반면에 인터넷은 300단어짜리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는 2초 정도가 걸린다. 팩스로 전송할 때 10초 정도가 필요한 것과 비교하면 겨우 5배 단축시킨 것이다.
…세탁기는 17킬로그램에 달하는 빨래를 세탁하는 시간이 4시간에서 41분으로 줄어들어 거의 6분의 1로 단축되었다.
…인터넷 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았다. 가전제품은 집안일에 들이는 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 줌으로써 여성들의 노동 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가사 노동자 같은 직업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 본문 중에서


저자 장하준이 인용한 사례들을 보면 작금의 AI 열풍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금은 너도나도 AI 열풍에 앞다투어 뛰어들고 있지만,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AI가 그렇게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가 아닐 뿐만 아니라 AI가 만들어 내는 세상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낮은 인플레이션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1980년대 이후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0퍼센트를 지향하는 극도로 낮은 인플레이션을 경제 안정의 바로미터로 정의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전 세계를 설득하는데 성공했으나 정작 역사를 돌아보면 상황은 정반대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즉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심화된 불평등에 더해 극심한 경제 성장률 하락을 경험했고, 19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잡는 데 성공한 선진국에서조차 1960년대와 1970년대의 1인당 소득 증가율은 3.2퍼센트였던 것이 1990년에서 2009년 기간에는 1.4퍼센트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극도로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실질 금리가 8~12퍼센트에 달하면, 어디에 투자를 해도 7퍼센트 이상의 이윤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실물 투자를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윤을 많이 낼 수 있는 방법은 고위험, 고수익의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것뿐이고, 실물 부문에 대한 장기 투자로 뒷받침되지 않는 금융 투자는 2008년 금융 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카고 대학이나 IMF에 적을 둔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행한 연구에서도 인플레이션이 8~10퍼센트 이하일 경우 국가 경제 성장과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왜 낮은 인플레이션이 경제성장을 담보한다는 굳건한 믿음이 생겨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이는 기본적으로 금융 자산 보유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 정책들이라는 것이다. 금융 자산의 수익은 대부분 명목상 고정되어 있으므로 물가가 오르면 상대적으로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낮은 인플레이션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나은 자본주의의 길

이처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자본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탐구하고, 더 나은 자본주의는 무엇인지 검토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 제도는 사람들이 이기심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은 하되, 인간의 다른 본성들을 모두 활용하고 사람들이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제도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경제학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지 않은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을 취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나, 제목에서 보듯이 23가지 주제가 산만하게 구성된 감이 없지 않다.

저자의 전작인 <사다리 걷아차기>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이미 읽어본 독자라면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아 식상함을 느낄 수도 있다.

만약, 비주류 경제학 서적을 처음 읽어보는 독자라면 내용도 신선하고 국내에서 16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답게 읽기 쉬운 문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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