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의 장편 소설 <고래>는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희극적인 풍경 속에서 살아간 운명적인 서사를 풀어낸 모험적 소설입니다.
이 글은 전편 <천명관 고래 부커상 최종 후보, 줄거리와 결말>과 <천명관 고래 줄거리 2편, 금복의 사내들과 뜻밖의 행운들>에서 이어지는 줄거리와 결말입니다.
소설 고래 결말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 마을을 잊고자 했던 금복에게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며 그녀의 운명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금복이 술집에서 무심코 내뱉은 ‘야로’라는 말은 초주검이 되는 고문으로 돌아왔고, 시멘트 벽돌의 출현은 벽돌공장을 문 닫게 만들었다. 文은 그녀와 처음 낮거리를 했던 개울가에 빠져 죽었다. 금복이 한때 사랑했던 남자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드디어 운명의 날, 금복은 800여 명이 운집한 고래 극장에서 서부극을 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예감을 느낀 춘희는 엄마를 만나러 극장으로 향했다. 춘희가 극장 로비에 들어섰을 때, 박색 노파가 극장 출입문들을 밖에서 하나하나 걸어 잠그고 있었다.

금복은 영화를 보며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려다 나이터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불이 순식간에 옮겨 붙기 시작했고, 8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훗날 극장 밖으로 춘희가 혼자 걸어 나오는 걸 봤다고 누군가 증언했다. 춘희의 참혹한 교도소 생활의 시작점이었다.
메인 여주 금복이를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지만, 소설 <고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니 지금부터 시작이다. 춘희가 참혹한 영어의 세월을 보내고 벽동공장을 다시 돌아오는 장면이 이 소설에서 소개했던 첫 장면이다.
춘희가 폐허가 된 벽동공장에서 홀로 벽돌을 굽는 나날들은 비극적 인간이 짊어진 숙명을 숙고하게 한다. 가끔 트럭 운전사가 뿌연 연기를 일으키며 벽돌 공장에 와서는 그녀에게 노란 원피스를 주고, 쌀가마니와 먹을거리를 주고 간다.
트럭 운전사도 춘희의 아버지 걱정처럼 타고난 장골 출신이었다. 전국을 유랑하는 트럭운전사는 춘희가 아이를 임신하자 발목이 묶일 것을 두려워 발걸음을 뚝 끊는다. 트럭 운전수가 떠날 때마다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그의 운명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 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약속이거든.”
눈폭풍이 휘몰아치던 어느 날, 춘희는 계곡을 헤매다 눈 속에서 그대로 아이를 안고 잠든다. 다음 날 아침 춘희가 깨어났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날, 마음을 고쳐 먹은 트럭 운전사가 춘희에게 오다 눈길에 미끄러져 트럭이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래도 낮과 밤은 흘러갔고,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었다.
소설 <고래>의 결말부의 마지막 페이지들은 하얀 백지 하단에 개망초가 하나 달랑 그려져 있고, 그다음 페이지 역시 하얀 백지 하단에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라는 짤막한 문장만 있다.
그다음 페이지에도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그다음 페이지도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끝맺는다.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결말부, 이것이 소설 <고래>의 마지막 문장이다.
작가가 붙인 에필로그 둘은 유려한 SF풍의 대서사시이다. 코끼리 점보가 춘희를 등에 태우고 하늘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올라 대기권을 벗어나고, 둥근 지구가 점점 작아져 아주 작은 푸른 구슬이 되고, 성간의 바다를 넘어 춘희마저 투명해져 간다.
천명관의 고래 독후감
제10회 문학동네 심사위원들은 소설 <고래>에 대하여 “예심 위원과 본심 위원들이 문학동네소설상 십 주년을 자축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 정도로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한 작가가 문학동네소설상까지 수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문학평론가 류보선)
“고래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뜻밖에 굉장한 흡인력을 발산하며 결말까지 숨 가쁘게 몰입하게 만든다.”(소설가 임철우), “누구든 이 작가의 입심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작가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작품에 빚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소설가 은희경)
“고래는 가히 소설이 무엇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고래>가 다루고 있는 그 유구하고 장려한 시간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문학평론가 신수정)라고 평했다.
정작 작가 천명관은 작품 속 어딘가에서 ”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 그 허망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며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끝없이 퍼져나가 마침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된, 여느 합궁에 대한 소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소설 <고래>의 배경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이다. 작가가 던져놓은 몇몇 단서들로 유추해 보면 춘희는 1953년생이고, 금복이는 1930년대생 쯤 될 것이다. 금복은 한국전쟁 때 전국을 거지와 같이 유랑하며 개고생을 했고, 박정희의 유신정권에도 잡혀가 개고생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 어디에서도 ‘한국 전쟁’이나 ‘박정희’라는 역사적인 용어들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나라의 큰 전쟁’이나 ‘선글라스를 쓴 장군’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이 알아서 어렴풋이 유추하도록 했을 뿐이다.
작가 천명관이 애써 그렇게 한 까닭은 소설 <고래> 이야기가 설화 혹은 신화처럼 읽히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박색 노파와 금복, 그리고 춘희는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작가 천명관은 화자의 입을 빌려 때로는 판소리의 소리꾼이 되어, 더러는 신파극의 변사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들에 짓궂은 해학과 익살, 음담패설과 같은 온갖 풍자를 섞어 우리 시대에 재현하려는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소설 <고래>는 한때 세상에 떠돌았던 허망한 이야기들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세상 도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욕망에 온몸을 떨고, 불꽃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스스로의 비극적인 운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광대한 우주 한편에서 한낱 먼지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운명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금복이 입버릇처럼 내뱉었다는 ‘어차피 섞어 문드러질 몸’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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