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2003)은 작가의 젊은 시절 한때를 엿볼 수 있는 여행 에세이이다.
1998년 여름, 작가는 첫 장편소설을 낸 지 열을 만에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시티 소재 아이오와 대학 주체의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참가하게 된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줄거리
작가는 대학 기숙사 8층에 묵으며 3개월 간 세계의 열여덟 나라-주로 제3세계에서 온 시인, 소설가들과 교류한 추억을 이 책에서 담았다. 이 산문집은 그로부터 5년 뒤 출판된 책이고 현재는 절판 상태이다.
이 산문집에서 작가 한강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첫 문장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로 시작한 이 책은 “다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난다.
작가는 아이오와시티에서의 보낸 자신의 젊은 시절을 특유의 감수성으로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에서 그려냈다.
이 산문집을 통해 이십 대의 작가가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들, 그 중에는 결코 완전히 펼쳐 보일 수 없는 것들-색채, 소리, 시간의 질감, 숱한 감정들, 조용히, 한없이 조용히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작가만의 내밀한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여느 여행 에세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미국 소도시에서의 추억을 작가는 소환한다. 17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이 산문집은 매 꼭지마다 거기서 만났던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형식을 택했다.
첫 장은 “태양의 딸, 살리달”이다. 작가는 피닉스에서 플래그스태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그레이하운드 정류장에서 그녀를 만났고 함께 나란히 앉아 버스를 타고 가면서 굴곡진 인디언의 삶의 애환을 듣고 그녀의 생을 추억한다.
그리고 다음 장은 “우리는 그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한다-파비앙”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 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작가가 아이오와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의 시인 파비앙이 한 말이다. 이토록 애써서 하는 일들에 결국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작가가 떠올리는 말이다. 작가 한강은 검은 머리, 검은 눈의 파비앙을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 드니 라방과 코와 이매가 닮은 남자라고 기억한다.
인간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필멸의 존재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한 장 한 장 벽돌을 구워 쌓아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면 우주와도 같은 광활한 허무에 견딜 수 없어진다.
이 산문집의 제명으로 뽑은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작가가 “그리운 내 친구, 은발의 로맨티스트1“라고 부르는 팔레인스타인에서 온 소설가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는 “그러니까, 이게 인생이지(So, this is life!)”라는 말도 입버릇처럼 했다.
작가는 마흐무드에게 유일하게 두 개의 장을 할애했다. 사랑이 아니면 마흐무드에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 살 때 이스라엘 군에게 고향을 잃은 뒤 청년 시절에 두 번 투옥되어 4년 간의 옥살이를 하고 그 뒤로 10여 년간 망명 생활을 했던 그에게 사랑 없이는 고통 뿐이었다.
작가 한강이 “하지만 때로는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반문하자, 그는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라고 대답한다.

이 산문집의 2003년 초판본 제목은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었다. 2009년 판본에서는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로 쉼표가 빠졌고 표지도 바뀌었다. 그러다 이 책은 절판이 되었다. 세상의 일은 이처럼 “모든 기억들이 단편으로 부서지고, 형태를 잃어간다. 조용히, 시간의 풍화 속에서 흩어진다.”3
그리고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그 당시 작가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었는지, 이십 대의 작가가 헤매고 서성거렸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여행을 다녀온 후기를 이러한 방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글쓰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김영하가 남긴 <여행의 이유>(2019)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이다.
작가는 누구에게나, 실현 가능하지는 않으나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겁기 때문에 꿈꿔보는 일들이 한두 가지쯤은 일을 것이라며 꿈 하나를 적어두었다.
“서점을 하는 여는 것이다. 생각해 둔 장소는 인사동, 경인미술관 골목이다. 골목이 깊이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반드시 1층이어야 한다. 규모는 보통 동네 서점의 두 배에서 세 배쯤이면 적당하겠다. 문학, 예술, 인문서적들을 주로 진열하고 중고등학교 참고서는 팔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아이들과 엄마들을 위한 코너를 갖출 것이다.”(119쪽)
작가는 책장을 어떻게 진열한 것인지, 어떻게 그 서점만의 베스트 20을 만들어 주마다 갱신할 것인지, 멤버십 카드와 뉴스 레터를 어떻게 제작해 운용할 것인지 등의 사소한 계획들을 노트 가득 적어 놓고, 도면까지 완성해 놓았다고 했다.
아이오와 시절, 한 달에 대여섯 차례씩 돌아오던 낭송회들은 작가에게 강렬한 경험으로 남았다. 작가는 텍스트와 목소리, 감정과 표정이 한 덩어리가 되는 순간을 사랑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비록 규모는 작아졌지만 작가의 꿈은 20년 뒤 결실을 맺게 된다.4
기억하는 사람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참가한 문인들은 작가 한강을 ‘스위트 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누군가는 얼굴도, 걸음걸이도, 목소리도 새 같다고 했다.
작가의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을 읽고 나니, 텔레비젼이나 동영상을 거의 소비하지 않는 나에게 소설가 한강은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를테면 좀 고독한 분위기가 아닐까 했는데 사교적이었다.
‘강’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작가 한강 하면, 엘레강스라는 단어가 떠오르곤 했는데, 작가와 함께 3개월 간 체류했던 문인들도 그런 느낌이었을지 모르겠다.
한강의 소설은 잘 읽지 않게 된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랄까. 심상의 저 깊은 곳까지 내려가 담담한 어조로 길러낸 그녀 특유의 문장을 대할 때마다 긴장을 넘어 인생의 어떤 숙연함 같은 것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매번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아직 내가 아픔에, 혹은 인생의 경건함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젊은 시절, 작가가 헤매고 서성였던 젊은 한때의 기억들을 함께 소환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산문집을 추천한다. 그리고 한강 소설 입문자들에게는 한강에게 부커 상을 안겨준 채식주의자들을 추천한다.
기억의 욕망은 기록을 낳고 기록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하게 되는 속성을 가졌으니까.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