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K의 미필적 고의, 애매모호한 전개와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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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길의 <형사 K의 미필적 고의>(걷는사람, 2021)는 제목에 이끌려 읽은 소설집입니다. 뭔가 추리소설 분위기도 나고 재미 있을 것 같은 예감이랄까요. 읽어보니 기대와는 달리 추리 소설은 아니고 순문학 소설이었습니다.^^

작가 이춘길 소개

“197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2011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소설가이다.” 책 날개가 제공하는 작가 정보는 이렇게 단 세줄입니다.

이춘길의 <형사 K의 미필적 고의>는 등단 10년 만에 출간한 작가의 첫 소설집이라는데요. 그것도 작가가 그간 발표했던 일곱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라고 합니다.

미필적 고의란

미필적고의는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어떤 범죄 결과의 발생 가능성을 인식하거나 예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발생을 인용한 심리 상태를 말하는 법률상 용어입니다.

예컨대 방에 누군가 있음을 알고도, 또 돌에 맞아 어쩌면 그가 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돌을 던져 다치게 했다면 미필적고의에 해당되어 상해죄가 성립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여담으로, 작가가 오랫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아니하여 독자가 작가를 잊었다면 작가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것일까요?

미필적 고의 책표지
책표지

이 책의 목차(수록 작품)

형사 K의 미필적 고의
동파
관리인
잡식동물의 딜레마
실종
카라반
피터의 편지

해설

단편 <형사 K의 미필적 고의> 줄거리

이 짧은 단편의 줄거리를 파악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인칭 소설에 문장도 모호했고 사건 개요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들도 애매하게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신용불량자인 형이 부탁해서 십 년 전에 나의 명의로 승합차를 한 대 뽑아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차를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가끔씩 날아드는 과태료 통지서를 보고 아직도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정도였습니다.

몇 달 전 그 승합차, 서울 60러 8051는 강원도 국도변을 달리다 갓길에서 퍼졌습니다. 폐차를 하려면 그동안 내지 않는 범칙금과 공과금 삼백만 원을 내야 했는데요. 형은 주인공과 상의하지 않고 8051 승합차를 고물상에 넘겨버렸습니다.

그 승합차는 고물상에서 낱낱이 분해되고 고철로 처리되었습니다. 아마도 불법으로 폐차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자동차 관리법 위반으로 벌금 백오십만 원을 내고 구청을 찾아갔으나, 구청에서는 공인된 기관의 폐차증명서를 가져오거나 도난신고 접수증이 없는 한 세금은 계속 부과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형이 연락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폐차한 고물상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폐차증명서도 받아올 수 없었고, 도난 신고도 명의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차를 관리하고 점유했던 형만이 할 수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하는 건가요?

그래서 주인공인 ‘나’는 명의자도, 소유자도 사실은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허위로 승합차 도난 신고를 하게 됩니다.

도난 신고를 접수한 형사 K는 내가 예상한 바와는 달리, 의외로 인근 지역 CCTV를 모두 조사해보겠다며 사건 해결에 열의를 보입니다. 

얼마 후, 형사 K는 사고 발생 지점 10km 반경으로 넓혀 CCTV를 탐독하고, 동일 전과자들을 상대로 탐문을 벌였지만 차량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사 방식을 심화해서라도 꼭 도난 차량을 찾겠다는 집착을 보입니다. 형사 K는 이번 사건을 단순한 차량 도난 사건으로 보지 않고 배후에 조금 더 어두운 범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형사 K의 그런 수사 태도에 주인공인 ‘나’는 범행(아마도 허위 신고를 한 행위?)이 밝혀지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느낍니다.

레인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주인공인 ‘나’는 그쯤에서 형사 K에게 차량 도난 신고는 허위였다고 자백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자백을 하면 형사 K가 승합차 8051이 무언가 강력 범죄의 범행 도구로 사용되었을 거라는 확신만 키울 수 있겠다고 걱정을 합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햄릿처럼 우유부단함이 극치를 보입니다.

주인공인 ‘나’는 형사 K가 수사가 확장되는 걸 막기 위해 허위로 자백했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단편 <형사 K의 미필적 고의> 결말

‘나’는 사건이 깨끗하게 종결되기 위해서는 차라리 형사 K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형사 K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작업하던 애니메이션 셀루로이드를 들고 형사 K 쪽으로 몸을 틀며 셀루로이드가 휘어지도록 천천히 힘을 가했다 풀자 휘어졌던 셀루로이드가 펴지면서 모서리에 묻어있던 핏방울이 허공에 산산이 흩어집니다.

장면이 바뀌어 촉수가 낮은 할로겐램프가 만드는 직경 2미터 정도의 원의 중심에 형사 K 역을 맡은 연기자는 팔다리가 뒤틀린 자세로 엎어져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할로겐램프는 여전히 주인공이 앉아 있는 의자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아래와 같이 뜬금없이 이렇게 끝납니다.

자, 자,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이제 당신 형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상이 이 짧은 단편을 읽고 사건 단서를 추정할 수 있는 핵심 요소들을 빠짐없이 정리한 줄거리입니다. 근데, 부록에 실린 윤재민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내가 파악한 사건 개요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당황했습니다.

문학평론가 윤재민의 해설

먼저,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형을 신용불량자로만 서술하고 있었는데요. 평론가 윤재민은 사설 경마장과 불법 하우스의 도박장을 전전하는 막장 인생을 산 친형이었다고 규정합니다. 텍스트에도 없는 경마장과 하우스는 도대체 어디에서 끌어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주인공의 명의를 도용하여 친형이 소유하고 있던 승용차가 주인공에 의해 불법 폐차된 정황이 드러나기까지 했다.”고 해설합니다. 텍스트에는 분명 주인공과 상의 없이 형이 폐차했다는 서술만 있었는데, 주인공이 불법 폐차한 정황을 평론가는 어디에서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윤재민 평론가는 “‘나’는 형사K를 잔혹하게 살해한다.”(251쪽)고 말했습니다. 셀루로이드가 휘어졌다 펴지는 힘에 의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잔혹한 살해에 해당되는 것인지 좀 웃음이 나왔습니다.

윤재민 평론가는 “이춘길의 소설은 쉽사리 플롯의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보다 갸웃한 순간이 압도적인 이 소설적 경험이야말로 이춘길 소설 제일의 미덕이자 에센스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추리소설도 아닌 순문학을 무슨 퍼즐 맞추기 게임 하듯 애매모호하게 서술하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 될 수 있고 에센스가 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승합차를 폐차한 것인지, 또 형사 K를 어떤 방식으로 살해한 것인지, 과연 살해를 하기나 한 것인지조차 애매할 지경이었으니까요.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서술했다면 그것은 작가의 명백한 미필적 고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작가는 형사 K가 영화 속 경찰관을 닮았다는 이유로 프랑스 영화 <베티 블루 37.2>(1986)를 인용하였으나 그 영화와 이 소설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므로 이 또한 지적 허영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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