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해 독서 통신 때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 소설 <숙명>(2020)의 독후감입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늘 그의 성실성에 대한 탄복하게 됩니다. 1985년 <방과 후>로 데뷔한 이래 약 40년 동안 매년 1~2편의 작품1을 발표해 왔으니까요.
숙명 또한 그의 성실성이 잘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다양한 군상의 등장인물과 복잡한 사건 구조, 하지만 작가는 늘 그렇듯 인간성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끈기 있게 풀어갑니다. 이 글에는 주로 인간의 운명과 숙명에 대한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숙명 간단 줄거리
등장인물 소개
- 우류 나오아키 UR 전산 대표이사로 암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장남 아키히코, 차남 히로마사, 딸 소노코가 있습니다.
- 우류 아키히코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지 않고 의사의 길을 택하는 주인공입니다.
- 와쿠라 고지 경찰이자 UR 전산의 공동 대표이사.
- 와쿠라 유사쿠 장래 희망이 의사였으나 가정 환경 때문에 경찰이 된 인물로 우류 아키히코와는 학창 시절 때부터 라이벌 관계에 있습니다.
- 스가이 마사키요 우류 나오아키가 죽고 나서 UR 전산의 새 대표이사가 되지만 독화살에 의해 살해됩니다.
- 시나에 UR 전산의 피실험자, 실험과정에서 이란성 쌍둥이 아키히코와 유사쿠를 낳고 의문의 죽임을 당합니다.
숙명의 실타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숙명의 기나긴 이야기를 벽돌 병원에서 시작합니다. 벽돌 병원은 UR 전산의 전신이었던 ‘우류 공업’이 비밀리에 생체 실험을 하던 사내 병원이었습니다. 뇌 속에 전자칩을 심어 인간의 감정을 조작할 수 있다는 이 실험은 일본 정부까지 나서 스파이를 양성 사업과 연계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울증과 유사한 발작, 영구적인 지능 저하 등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 실험은 중단되고 비밀에 부쳐집니다. 생체 실험에 동원된 가난한 일곱 명의 피실험자들은 일부는 실험실에서 도망치고 일부는 실험 후 원래대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죽거나 지능 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이 실험의 피실험자 중에 한 여성이었던 ‘사나에’는 도망간 피실험자들 중 한 명이었던 중국인 고아 사이에서 쌍둥이 아키히코와 유사쿠를 낳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이런저런 사유로 아이가 없었던 UR 전산의 대표이사였던 우류 나오아키와 경찰 와쿠라 고지가 각각 입양하게 되고, 입양 사실은 비밀에 부쳐지고 사나에의 죽음도 의문사로 남게 됩니다.
UR 전산은 창사 이래 우류 가(家)와 스가이 가(家)에서 번갈아가며 대표를 맡아왔습니다. UR 전산 대표이사 우류 나오아키가 암으로 사망하자 스가이 가(家)의 스가이 마사키요가 새 대표이사로 취임하게 되지만 등에 화살을 맞아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마사키요는 화살에 묻혀진 치명적인 독성으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었는데요. 그 석궁과 화살은 전임 사장 나오아키의 유품이었습니다. 경찰은 자연스럽게 장남 아키히코를 비롯해 우류 가문을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수사를 시작합니다.
스가이 가문은 우류공업의 비극적인 실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사업을 부활하려는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새로 취임한 스가이 마사키요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이어 그 실험을 이어가려고 한 것이지요. 그로 인해 그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속죄의 길
아키히코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중대한 비밀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던 우류 공업이 인간을 대상으로 뇌에 관한 실험을 했으며, 자신이 피실험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으나 입양되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는 회사를 경영하기 위해 유학을 가는 대신 의대에 진학해서 뇌과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비록 친모는 죽었지만 생사를 알 수 없는 친부를 찾아 원래의 뇌상태로 돌려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냐. 너는 희생자 쪽 사람이잖아. 그런 네가 속죄를 해야 하다니.” 유사쿠가 말하자, 아키히코는 뭔가 눈부신 것이라도 보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어떤 피가 흐르는지는 관계없어. 중요한 건 내게 어떤 숙명이 주어졌는가야.”
본문 p. 389~390
아키히코 본인이 희생양이지 않느냐고 유사쿠가 이야기 하지만 우류가의 자식이 된 이상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숙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희생자로 살아가는 것은 쉽습니다. 핑계를 댈 곳이 있으니까요. 어린 시절의 적절하지 못했던 양육 환경의 희생자로 자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성장이 멈추어 있는 사람들이지요.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여기서부터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과거 혹은 미래 어느 시점으로 생각이 떠났다가도 바로 현재의 나로 돌아와 쿵쾅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아키히코는 일주일 간의 방황과 고민을 끝내고 자신의 불행한 출생의 비밀을 풀고자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바로 회사의 경영자가 되는 대신 의사가 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지요. 조용조용 자신의 현재를 촘촘하게 살아가는 아키히코의 모습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힘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사 와쿠라 유사쿠도 피의자 중 한 명인 우류 아키히토 두 사람은 사나에가 낳은 이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유사쿠가 한때 사랑했던 미사코는 현재 아키히코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미사코는 ‘보이지 않는 실이 아닐까. 그 실이 아직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도 내 인생을 조종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 캐릭터입니다. 미사코의 생각처럼 세 사람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숙명으로 엮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아키히코가 자신의 의지로 가지고 다른 형태로 그 숙명을 받아들입니다. 숙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아키히코의 선택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는 이유
추리 소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야기에는 삶에서 마주하는 갖가지 선택 상황에서 겪는 인간적인 고뇌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할 때 이런 점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수학 교사의 선의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선의가 비록 살인으로 이어졌더라도 말입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의 ‘춤추는 아이’라는 이야기에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살인의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가는 늘 독자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줍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할 것인가’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이런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야말로 히가시노 게이고 장르라 할만 합니다.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만듭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읽어나가는 수 밖에요.
숙명의 의미
히가시노 게이고가 말하는 숙명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유사쿠와 아키히도가 사나에의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각각 형사와 기업가의 가정에 입양되었다는 것과 미사코의 아버지가 우류기업의 피실험자였다는 사실 같은 것을요.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그들이 살아가면서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작가는 그 선택에 무게를 둡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마저 우리의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지를 알려줍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봅니다. 내가 하는 선택과 결정을 곰곰이 되새겨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적당히 불완전하고, 적당히 완전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상황에서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다면 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네요. 저는 적당히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들
- 참고로 <魔女と過ごした七日間>(마녀와 보낸 7일간)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100번째 작품으로 지난해 3월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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