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크리스마스 이브다. 저녁을 먹고 나도 모르게 졸았다. 저녁을 먹을 때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가까운데 치맥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었는데 깜박 잠이 들었다. 소파에서.
선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아내 역시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일상에 지쳐 잠에 빠진 부모를 보고 아들이 실망한 눈치였다. 아내는 이내 본격적으로 꿈나라로 가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낭만이 별로 없다. 낭만이 없는 여자를 아내로 만나면 단점도 있고 분명 장점도 있음을 최근에야 깨닫기 시작했다.
사람은 가끔 센치할 필요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무덤덤한 것이 장기적으로는 좋은 것임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빠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들에게 치킨을 시켜 먹자고 급히 제안을 바꾸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만큼 저렴하게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는 가족도 없을 듯싶었다. 치킨 하나로 크리스마스 이브를 때우다니, 좀 그렇지 않은가.
멀리 기숙학교에 있는 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딸이 있었으면 조금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케이크로 불을 밝혔을 테니까. 한참 후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도 초저녁 잠을 잔 모양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우리 가족이 케이크를 다 같이 먹던 때가 좋았다.”라고 말했다. 딸은 요즘 나름 힘들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일모레, 대입 원서 접수를 해야 하는 시즌이니까.
딸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오르지 혼자 힘으로 수능을 준비했다. 그 막막함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딸이 큰 욕심 없이 목표로 한, 집 가까운 대학에 꼭 합격했으면 좋겠다.
치맥을 위해서 치킨을 배달시키고 맥주 페트를 사 왔다. 맥주는 병맥이지만, 페트 맥주가 저렴해서 언젠가부터 페트 맥주만 마신다. 올해 7월 1일 이후로 매일 맥주를 마시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면 잠들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치킨에 대한 아들의 입맛은 수시로 변한다. 요즘 아들의 치킨은 지코바다. 한 마리에 2만 원. 아마도 여기에 배달비 3천 원 정도가 포함되어 있을 거다. 배달의 민족도 독일계 회사에 팔렸다지, 아마.
아들과 치맥을 하면서 – 아니 아들은 콜라만 마셨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만 치맥을 한 셈이지만 –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들은 ‘기생수’라는 애니를 보며 키득거렸다. 술에 취약한 DNA를 아들이 물려받지 않아 신에게 감사한다.
생각건대,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어리다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를 근사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돌이켜보면 우리 아이들에게 쪼달리는 박봉에 너무도 무심하여 크리스마스 선물을 제대로 해 준 적이 없었다.
세월은 이렇게 가기만 하고 생에 대한 후회는 쌓여만 간다. 과연 이것이 내가 생각했던 인생이었던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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