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반열에 오른 <아Q정전>은 중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중국 작가들로부터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을 받는 루쉰의 대표작이다. 단편 소설과 산문을 주로 쓴 루쉰의 유일한 중편 소설이기도 하다.
1921년 주간지에 발표되었던 <아Q정전>은 그 당시 중국 사회에 만연하였던 패배주의와 노예근성을 통렬하게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아Q정전 줄거리
이 소설은 화자가 아Q라는 인물에 대한 정전을 쓰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정전(正傳)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바르게 전하여 오는 전기(傳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Q정전>은 아큐라는 인물에 대해 바르게 전하여 오는 전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화자는 주인공으로 삼은 아Q가 영웅도 아니고 위인도 아니니까 변변찮은 소설가들이 “여담은 그만두고 이제 정전으로 돌아가 이야기할 것 같으면······.”이라고 하는 틀에 박힌 말에서 ‘정전’이라는 두 글자를 따 이 소설의 제목으로 삼는다고 했다.
하필이면 왜 아Q일까?
그러면 이름이 왜 아큐일까? 이에 대해서 작가 루쉰은 화자의 입을 빌려 이 소설의 서두에서 친절하게도 그 내력을 아주 길게 설명한다.
화자는 아Q의 성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큐가 성이 ‘자오’인 듯도 하더니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도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오 나리 댁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이 웨이좡 마을에 전해지자 마침 황주 두 사발을 마신 아Q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자랑을 하더라는 것이다. 자기가 자오 나리와 원래 한 집안이고 장원급제한 생원보다 세 항렬 윗길이어서 증조할아버지뻘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웨이장 마을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동네 행정관이 아Q를 자오 나리 댁으로 데려갔고, 자오 나리는 아Q를 보자마자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아Q 너 이 개자식! 네가 우리하고 일가라고 했다지? 네놈이 얻다 대고 헛소리를 지껄여” 내가 어떻게 너 같은 놈과 한집안이더냐? 네 성이라 자오라고?”
아Q는 입을 다물고 물러날 생각만 하는데 자오 나리가 달려들더니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
“네가 어떻게 자오 씨냐! 너 같은 놈이 가당치도 않게 감히 자오 씨라니!”(93쪽1)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아Q의 성이 자오가 아닐 것이고, 정말로 자오라고 해도 자오 나리가 마을에 사는 한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의 성씨를 거론하는 사람이 더는 없어서 화자는 아Q의 성씨가 무엇인지 결국 알 길이 없어졌다고 했다.
문제는 작가가 아Q의 성씨는 물론이고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Q가 살았을 때 아Quei라고 불렸고, 죽은 뒤에는 아Quei를 입밖에 낸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화자로서는 이름을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Quei가 계수나무 계자를 쓴 아구이일까, 귀할 귀자를 쓴 아구이일까? 여러가지로 상상해 보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고향 사람에게 아Q의 범죄 기록까지 조사했으나 소득이 없어서, 그냥 약칭으로 아Q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다만, 아Q의 ‘아’ 자만큼은 아주 정확해서 억지로 갖다 붙이거나 다른 것에서 빌려왔다는 등의 문제는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정신 승리의 기록
그럼 아Q는 전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집이 없어서 웨이좡 마을에 있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사당에서 살았다. 딱히 직업도 없어서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날품을 팔며 먹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시킬 일이 있을 때만 아큐를 떠올렸을 뿐, 일이 없을 땐 아Q라는 인물 자체를 새까맣게 잊고 살았으므로 그가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도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Q는 자존심 하나는 무척 강해서 마을 사람들을 무시했다. 그는 장차 생원이 될 글방 도령들도 ‘내 아들놈이 너보다 훨씬 더 나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백안시했다. 물론 그는 아들은커녕 장가도 들지 않은 처지였다.
아Q의 말에 의하면, 그는 ‘옛날에는 잘살았고’ 아는 것도 많은 데다 ‘일도 잘하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언젠부터인가 그의 머리에 나두창2 부스럼 자국이 몇 군데 생겼다.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는데, 아큐는 상대를 가늠해보아 말발이 달리는 사람 같으면 냅다 욕을 퍼붓고, 힘이 달리는 사람 같으면 때려주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항상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화난 눈길로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그것을 안 웨이좡 건달들이 더더욱 그를 괴롭혔고 그의 누런 변발3을 틀어쥐고는 벽에다 네다섯 번 소리가 날 정도로 찧고 나서야 돌아갔다.
“아들놈에게 맞은 셈 치지.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라니까······.”(99쪽)
그럴 때마다 아Q는 아들놈에게 맞은 셈 친다고 생각하니까 아주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아Q에게 이러한 정신적인 승리법인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이건 자식이 아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며 더 심하게 때렸고, 아Q는 자신이 버러지라고 스스로를 경멸한 다음에야 풀려났다.
이때에도 아Q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데에는 자기가 ‘첫째가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이 분야에서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했다.
이런 식으로 정신 승리를 쌓아가던 아Q에게도 패배의 날이 찾아온다. 야바위 노름을 즐기던 그가 웨이좡 마을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날 밤 열린 야바위판에서 돈을 크게 땄지만 야바위꾼들의 싸움에 휘말려 딴 돈을 몽땅 잃어버리고 만다.
그날 밤 아Q는 그 돈을 아들에게 빼앗긴 셈 쳐도, ‘난 버러지야.’라고 생각해도 여전히 개운치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조금이나마 패배의 고통을 느끼는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을 승리로 바꾸었다.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연달아 두 대 갈겼는데, 얼얼한 게 조금 아팠다. 때리고 나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때린 사람이 자기이고 맞은 사람은 또 다른 자기인 것처럼 느껴지더니, 조금 지나자 자기가 다른 사람을 때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그는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이 되어 자리에 누웠다.”(102쪽)
연애의 비극
아Q는 기본적으로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려고만 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무릇 비구니는 중하고 정을 통하기 마련이고 여자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 남자를 꾀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Q가 여자들이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유심히 들어보았지만 남자를 유혹하려는 말투 같은 것은 없었는데, 이것도 여자의 가증스러운 점 가운데 하나로 여자들은 다들 짐짓 정숙한 척 한다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어느 날 아Q는 길을 가다가 정수암의 젊은 비구니를 만나자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그날은 다른 사람에게 굴욕을 당한 뒤라 음담패설과 함께 볼을 꼬집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런데 그게 비극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Q는 젊은 비구니의 얼굴 감촉이 계속 생각했던 것이다. 하루는 자오 나리 댁의 여자 하인 우 어멈에게 “나랑 자자, 나랑 자!”라고 수작을 걸다가 대나무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쫒겨나는 일이 발생한다.
그는 자오 나리에게 사죄하느라 이불과 솜 옷도 팔았고 웨이좡 마을 여인들은 모두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날품팔이 일거리도 끊겼고 술집에서는 외상도 주지 않았다. 아Q는 도망치듯 일거리를 찾아 성안으로 들어간다.
금의환향과 혁명
아Q는 그해 추석이 막 지난 무렵, 새 저고리를 입고 허리에는 은화가 가득 든 돈 주머니를 묵직하게 차고서 다시 웨이좡 마을에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그는 성안 거인 나리의 집안일을 거들어 주고 큰 돈을 벌었지만 그가 정말 ‘빌어먹을 놈’이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그 집에 일을 거들어주려 가지 않을 작정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를 경외했고, 규방 여자들이 아Q에게 비단 치마를 사고 붉은 서양 날염 옷가지를 싸게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을 여자들은 눈이 빠지게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뒤에 밝혀지지만 그가 판 물건들이 장물이었으니 가격이 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통 3년 9월 14일(1911년 11월 4일) 한밤중, 검은 거적을 덮은 배가 자오 나리 댁 앞 선창에 닿았다가 해가 뜰 무렵 떠나갔다는 불안한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검은 거적을 덮은 배는 거인 나리의 배였으며, 혁명당이 성안에 들어와서 거인 나리가 피난 온 것이라고 했다가 거인 나리가 헌 옷 상자 몇 개를 들고 와서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을 당해 도로 가지고 갔다. 아니다, 그 상자는 지금 나리 댁 마님 침대 밑에 숨겨져 있다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아Q는 처음에 혁명당은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고 반란은 그를 힘들게 할 것이라고 생각해 증오했으나, 거인 나리가 혁명당 때문에 벌벌 떠는 것을 보고 ‘혁명도 좋은 것이구나.’라고 생각에 이른다.
바야흐로 웨이좡 마을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자오 나리 댁의 생원 선생이 변발을 머리 위로 말아 올렸고 그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아Q도 변발을 머리 위로 말아 올리고 혁명당원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으나 어쩐지 푸대접을 당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혁명을 하려면 말로만 가담해서는 안 되고, 혁명당원을 알고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유일하게 알고 있는 혁명당원 ‘가짜 양놈’ 집에 찾아가 자기도 혁명에 가담해 보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단칼에 쫓겨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오 나리 댁이 털렸고 나흘 뒤 아Q는 범인으로 지목되어 한방중에 갑자기 체포되어 성으로 끌려갔다.
결말, 대단원(스포일러)
대청 마루 위에는 머리를 박박 깎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거인 나리였으나 아Q는 그를 알아볼 리 만무했다. 나흘 간의 취조 끝에 그는 서명을 하고 사형을 당할 참이었다. 관리들이 글을 모르는 그에게 동그라미로 서명을 대신하라고 했다.
“아Q는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했지만 붓을 쥔 손이 계속 덜덜 떨렸다.(중략) 아Q는 엎드려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는 남들이 웃을까 봐 최대한 동그랗게 그리려고 했지만 빌어먹을 붓이 무거운 데다 도통 말을 듣지 않았고, 벌벌 떨며 겨우 동그라미를 다 그릴 때쯤에 밖으로 비쳐나가 호박씨 꼴이 되고 말았다.”(149쪽)
아Q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정신 승리법을 구사한다. 살다 보면 감옥에 잡혀 들어올 때도 있고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릴 때도 있는 것이라며 또 정신 승리를 하는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 아Q는 수레에 태워져 형장으로 끌려갔다. 자기의 목을 날리러 가는 길임을 그때야 안 그는 다급해져 눈앞이 깜깜해지고 귀에 천둥이 치고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다시 태연해졌다. 살다 보면 원래 목이 날아갈 때도 있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총살은 목을 치는 것보다 볼거리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얼마나 덜떨어진 사형수였는가? 그렇게 오래 거리를 끌려다녔으면서도 노래 한 소설 못하다니. 괜히 따라다니느라 헛고생만 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아Q정전의 마지막 문장)
작품 해설
루쉰이 이 소설을 발표한 1921년 당시 중국은 민중의 열망이었던 신해혁명이 흐지부지 끝나고 망해가던 청 제국은 발악하고 일본의 침략에 전전긍긍하던 암흑기의 연속이었다.
루쉰은 일본 유학을 떠날 때에만 해도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일본에 포로로 잡힌 동포를 구경하는 중국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작가이다.
그의 데뷔작 <광인일기>를 발표하며 광인이라는 충격적인 비유를 통해 무지몽매함에서 청년들이 깨어나기를 촉구했던 루쉰은 <아Q정전>에서는 당시 중국 사회에 만연해 있었던 봉건적인 패배주의와 노예 근성에 절망한다.
지금은 이 소설의 주인공 아Q가 정신 승리의 보통 명사가 되었지만, 당시 작가는 아Q를 중국인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섰다.
아Q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스스로는 아주 많이 아는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툭하면 맞고 다녔지만 아들에게 맞은 셈 쳤고, 심지어는 자신의 뺨을 때리면서 남을 때렸다는 정신 승리를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중국인들이 신해혁명을 한답시고 정신 승리를 했음이 드러난다. 진정 눈물 나는 장면은 그가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웃을까봐 걱정 하면서도 진작 자신이 죽는다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는 살다 보면 원래 목이 날아갈 때도 있는 거라고 정신 승리하는 대목이다.
루쉰은 이러한 정신이 중국인의 뼈 속까지 녹아 있다고 절망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반성을 많이 했다. ‘살다 보면’이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많이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작가는 아Q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끝까지 승리하며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그렇다면 던적맞은 아Q의 일생과 허무한 죽음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스스로 답해야 할 물음이다.
- 참고로 이 글은 이욱연의 <루쉰독본>(휴머니스트, 2020)에 실린 <아Q정전>을 읽고 쓰는 리뷰이므로 루쉰독본의 쪽 수이다. ↩︎
- 위장 계통의 열 때문에 머리에 나는 부스럼을 말하며 모양이 나병과 비슷하다고 한다. ↩︎
- 몽골인이나 만주인의 풍습으로, 남자의 머리를 뒷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임. 또는 그런 머리.(표준국어사전) ↩︎
루쉰 프로필
- 1881년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 소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주수인(周樹人; 저우수런)으로 ‘루쉰’은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처음 사용한 필명이다.
- 190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중국인을 위한 어학원에 다녔고,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현 도후쿠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수가 틀어준 뉴스 필름에서 중국인 포로를 구경만 하는 중국인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 1909년 귀국하여 항주의 양급사범학교에서 과학 교사로 일하다가 1910년 고향으로 돌아와 소흥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후에 소흥 사범학교 교장에 취임한다. 1910년 신해혁명으로 1912년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교육부원으로 일하게 된다.
- 1918년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인 <광인일기>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으며 1919년 5.4운동 때,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신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 1921년 주간지 <신보부간>에 파인(巴人)이라는 필명으로 중편 소설 <아Q정전(阿Q正傳)>을 연재하였으며, 중국 전역은 충격에 휩싸인다.
- 1922년 첫 소설집 <납함> 출판했으며 1923년에는 강의 내용을 다듬은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을 간행했다.
- 1926년 소설집 <방황>을 출판하고 정부의 지식인 탄압을 피해 샤먼과 광저우를 거쳐 1927년 상하이에 정착하여 중국좌익작가연맹 등에도 가입하여 활동을 했으며 죽기 전까지 9권의 잡문집과 소설집 <고사신편(故事新編)> 등을 펴냈다.
- 1936년 청년 작가로부터 중국의 ‘막심 고리키’라고 존경을 받았던 그는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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