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이정표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소설가로서 이정표가 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야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소설을 써서 먹고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 같은 것이었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네 번째 장편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뮤직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몽환적이면서도 알 수 없는 인생의 신비로움을 터치하는 작품입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관이 거의 집약된 세계의 끝은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작가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메마른 인문학적 감성을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독서모임을 결성하고 첫 작품으로 선택한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입니다. 세계의 끝에 다다르고자 하는 하는 꿈,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 글은 독서모임 세 사람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리뷰입니다. 세 사람이 쓰다 보니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고 튀는 부분도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대 배경
본격적인 북 리뷰에 앞서, 소설 내용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위해 저희 멤버들은 작가 및 소설이 쓰인 당시의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전념하였으나(전국 학생 투쟁 공동회의, 이하 전공투), 전공투가 와해된 후 그 산하의 구성원들이 순순히 대학 졸업 후 일본의 대기업에 취직하는 모습에 큰 실망감을 느끼고 이후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주의(ism)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빠르게 마치기보다 빛을 내서 아내와 함께 도쿄 외곽에 재즈 카페를 열었고, 순조로운 영업 속에 가게를 도심으로 이전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30살 때인 1975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
이 작품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별개의 두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등장하는 병렬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두 명의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작품 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거의 흡사합니다. 이들은 장기적인 삶의 목표나 의욕이 상실된 모습을 보입니다.
기계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만 하며,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삶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저희는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전공투 사태 이후 큰 실망감과 회의감을 느낀 작가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이 하루키의 4번째 장편 소설로 전공투 사태를 겪고 얼마 되지 않은 초기의 작품이고,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나’로 지칭되는 1인칭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설이 전개되면서 주인공들은 점차 본인의 일상을 벗어난 사건에 얽혀 들어가며, 상술된 본인의 삶에 대한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됩니다.
본인을 제외하고 허울뿐인 관계만 존재하던 기존의 삶에서 나아가 타인과 점차 엮이게 되면서 주인공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주인공 내부의 인식 변화는 주로 성관계라는 장치로 작품 내에서 서술되는데, 동일한 여성과 잠자리를 가지면서도 작품 전후에서 전혀 다르게 묘사된다던가, 혹은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작품 전후로 전혀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갖게 된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일종의 문제 해결수단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장치들
독서모임 구성원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는 소설 내부에 등장하는 다양한 장치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작가가 다양한 비유와 심상을 이용해 소설을 전개해나가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나눠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소리를 없애는 기술’을 보호하고자 하는 ‘계산사’인 주인공과 반대세력인 ‘기호사’와의 대립입니다.
소리를 없애는 기술을 개발한 한 노인으로부터 주인공은 이를 안전하게 암호화해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는데, 계산사인 주인공의 능력은 본인의 두뇌를 컴퓨터처럼 활용하여 주어진 수치를 암호화할 수 있는 것이고, 기호사는 그렇게 암호화된 데이터들을 중간에 가로채어 해독하는, 대척점에 있는 세력으로 묘사됩니다.
앞서 살펴본 작가의 배경이나 주인공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소리를 없애는 기술은 점점 심화되는 개인 간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고, 계산사와 기호사는 그러한 것을 가속화시키는, 고도화되었으나 편을 갈라 싸우는 현대 사회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다음으로 ‘세계의 끝’은 그림자를 뺏긴 주인공이 마음을 잃은 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들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내용인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보다 더 많은 심상과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1권만 읽고 장치들의 의미를 모두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잃고 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마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향할 디스토피아를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주제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당 소설에서 삶에 대해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주인공들을 내세워,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현대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함과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성장해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면서도, 파편화된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사람 사이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아직 의미가 불명한 소설 내의 여러 심상들이나, 모호한 연결고리를 가진 별개의 두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이어질 것인지는 아마 2권에서 많이 밝혀질 것 같고, 결말 부분까지 전부 읽은 후에 조금 더 명확한 책의 주제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권 리뷰
마음 없이 사는 것이 평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이야기는 두 가지 세계로 나뉩니다. 편의상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으로 부르겠습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은 소통조차 불가능한 야미쿠로의 위협을 받고 진영논리에 기반한 기호사와 계산사의 적대를 삽니다.
우호적인 박사와 그 손녀도 주인공의 상황보다는 자신의 죄책감과 호기심이 먼저이며 가장 깊은 관계를 나눈 사서에게도 주인공은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습니다. 주인공과 주변은 계속 헛발질을 계속하며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이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아무렴 세상이 자신에게 관심 없는 만큼 자신도 세상에 관심이 없다고 독백하는 주인공입니다.
세계의 끝에서도 마을주민들은 마음 없이 사는 것이 평화로우며 괴롭지 않은, 익숙해지면 그만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과거 학생운동을 나섰다가 실패하고 전향하는 동지들을 지켜봐 왔을 작가가 스스로에게 되뇌던 말도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주인공은 마음을 되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파편화되고 분절된 이 사회 속에서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괴로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공허한 마음을 상징하는 셔플링 시술을 버텨낸 것은 오직 주인공 뿐이고, 다른 피험자는 모두 죽었다는 언급이 등장합니다. 공허한 마음은 그 자체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갑작스럽지만 여러분께서는 재즈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재즈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음악, 특히 재즈가 자주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곧잘 음악을 떠올리거나 흥얼거립니다. 안타깝게도 주인공의 취향이 주변인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 않지만요.
세계의 끝에서 주인공은 악기를 찾습니다.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연주를 하지 않기 때문에 찾아낸 악기는 먼지투성이었죠. 음악만큼 감정을 빠르고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도 드문 것 같습니다. 미술이나 시는 함축적이지만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면 소설이나 연극은 시간이 오래 걸리죠.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재즈를 떠올리며 흥얼거릴 때마다 저도 찾아들어보곤 했습니다.
주인공의 1인칭 독백을 듣고있으면 남에게도 무심하면서 자기 자신의 감정에도 어두운 인상이 떠오르는데 음악을 함께 듣고 있으면 주인공의 마음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인용은 주인공이 그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등장인물들-박사의 손녀, 사서-와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주인공은 그들과 음악을 나누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직접 가사를 흥얼거리거나, 찾아낸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자동차에서 틀거나. 이렇게 소설의 음악을 쫓아가다 보면 주인공과 타인의 관계가 주인공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볼 수 있는데요, 타인과 주인공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역으로 주인공은 스스로와의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장에서 주인공은 자신만을 위한 재즈와 함께 최후를 준비합니다.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에게 그림자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다 보면 주인공의 행동에 의문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공은 스스로의 생각을 분명히 표현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감정을 겨우 서술하는 게 고작으로 보입니다. 이런 호기심을 가장 증폭시키는 것은 주인공이 그림자와의 도주를 포기하는 장면입니다.
작중에서 주인공에게 그림자는 마을을 벗어난 미래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마을을 혼자 떠나지 못하는 건 그림자가 잡혀있기 때문이며 그림자에겐 마을을 떠나 다시 하나가 되자는 약속을 나누었죠. 마을의 사람들은 마음을 잃어버린 존재들로서 유일하게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공에 대립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마을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그림자를 혼자 내보내기로 선택합니다. 주인공은 그림자에게 말하죠.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이므로 자신이 책임져야 하며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고요.
그러나 어차피 마을이 곧 자기자신이라면 주인공은 무엇을 책임진다고 말하는 걸까요?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사서입니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사서와의 관계가 진전되어 결혼까지 이야기하는 사이가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한 발 물러서고 말죠. 그리고 뜬금없이 과거의 동창이자 혁명가와 결혼해 사는 여자가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합니다. 계산사 주인공이 아닌 작가의 개입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주인공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 또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재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고통스럽다하더라도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되찾았다 해도 타인과 함께하는 미래-결혼-에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주인공이 마음을 잘라낸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였고 그만큼 저버렸던 이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을 위해 마음을 잘라냈던 죄가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남은 과거의 존재들에 대해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그들과의 관계를 새로 세워야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박사의 말,
“그러나 자네는 그 세계에서, 자네가 여기에서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자네가 잃어버린 모든 것, 그것들은 다 거기에 있어.”
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버렸던 것을 되찾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로 뛰어듭니다.
이게 적절한 태도인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지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애도를 바쳐야 할 과거 또한 실재하는 것입니다. 저희로썬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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