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러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정지인 옮김, 곰 출판, 2021)는 특이하고 경이로운 논픽션이다. 소설보다 문학적이고, 추리 소설보다 사건의 단서를 추적해가는 스릴이 더 넘친다.
어떤 교양 과학서적보다 철학적인 물음을 깊게 던진다. 이 책은 어류 분류학자이자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저자의 삶이 서로 교차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간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와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 그리고 삶의 엄청난 반전이 정교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작은 책에 이토록 큰 세계를 담았다니, 간결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저자의 과학적 글쓰기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줄거리
저자 룰루 밀러
과학전문기자로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Peabody Awards)을 수상했다.
15년 넘게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NPR)에서 일하며 《뉴요커》, 《VQR》, 《오리온》, 《일렉트릭 리터 리처(Electric Literature)》, 《캐터펄트(Catapult)》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해왔다.
화학자인 아버지는 어린 룰루 밀러에게 인간은 개미와 다를 바 없다는 과학 정신을 심어주었다. 룰루는 여섯 살 어린 그레이스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룰러 밀러는 이성애자로 알고 살아왔으나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였다. 동거하던 곱슬머리 남자가 그녀의 성 정체성을 알고 떠나가자 극심한 충격과 혼돈에 빠진다.
그러나 룰러 밀러는 곱슬머리 남자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자신의 혼돈과 무의미한 세월을 견디어 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줄 정신적 지주로서 생물 분류학자 데이비스 스타 조던의 삶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 1931)
생물 분류학자이자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 역임. 코넬 대학에서 과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 시절 집에서 몰래 빠져나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을 익히려 했고, 5년 만에 밤하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미들 네임 ‘스타 starr’도 그가 골랐다.
데이비드와 그의 연구팀은 어류 1만 2,000~1만 3,000종 가운데 2,500종 이상을 발견하고 학명을 붙였다.
그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수집한 어류 표본이 풍비박산 나는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물고기의 살에 표식을 꿰매는 작업에 돌입하는 놀라운 신념과 끈기를 보여주었다.
룰러 밀러는 곱슬머리 남자에게 앞으로는 여자와 키스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잘못을 비는 이메일을 보내고 그를 기다리는 고통의 3년 동안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 집요하게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하늘의 별이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판에 핀 꽃에 빠져 있었던, 또래로부터 놀림을 받던 볼품없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어떻게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참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룰러 밀러는 너무나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면 자신도 어떤 희망을 품고 이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전반부는 부모의 눈 밖에 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스탠퍼드대 초대학장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세상의 모든 물고기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겠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불굴의 의지와 투지는 명성을 불러왔고, 스탠퍼드대학을 세운 릴런드와 제인 스탠퍼드 부부로 하여금 그를 초대 학장에 초빙하게 했다.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이 된 데이비드는 첫 번째 아내가 병으로 죽는 시련 앞에서도, 딸 바버라를 잃는 고통 앞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새로운 물고기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업을 멈추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사모아로 갔고, 러시아로, 쿠바로, 하와이로, 알바니아, 일본, 한국, 멕시코, 스위스 그리고 그 너머까지 어류 수집 원정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그의 과업을 단 한순간에 파괴해버려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실패와 역경을 딛고 ‘그릿’
무엇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대재앙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며 다시 희망에 찬 신념으로 재건의 발걸음을 다시 걷게 했을까.
저자 룰루 밀러는 평범했던 데이비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용기의 단서를 그의 오래된 에세이에서 마침내 발견해 냈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의 그러한 성격적 특성을 심리학자 더크워스가 정의 내린 ‘그릿’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그릿의 대표주자였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바라는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일하고 그런 다음 결과를 차분히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아가 나는 일단 일어난 불운에 해해서는 절대 마음 졸이지 않았다.”
– 데이비드 스타 조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마음가짐은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동아시아인 그렇게 닿고자 했던 경지와 그대로 일치한다. 자신의 할 일은 최선을 다해 다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인간으로서의 최고 경지 말이다.
심리학자 더크워스는 웨스트포인트 사관생, 최고경영자, 뮤지선, 운동선수, 셰프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귀에 착 달라붙는 ‘그릿 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을 그릿으로 불렀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능력,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그릿이다.”(143쪽)
그릿이 그런 거라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야말로 그릿의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삶을 산 인물이었다.
간혹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심각하게 오독한 독자가 그래, 나도 지금부터 ‘그릿!’, 희망에 부풀어 엉뚱한 구렁텅이로 자신을 몰아넣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궁극적으로 실패를 하게 되면 결국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부족탓을 하게 되는 근거로 그릿이 악용될 수 있다.
그릿을 가지고도 실패하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 성공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구해보니 이들에게 ‘그릿’이라는 특질이 있더라고 규정하는 것은 생존자 편향이나 일종의 통계 착시에 다름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릿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속되는 행운도 있었고, 넘사벽의 재능도 몰론 있었다.
저자가 이 부분을 치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그래도 룰루 밀러는 ‘그릿’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의 반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추악한 진실은 우리들을 역겹게 만든다. 혹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어보실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나머지 부분은 완독 후 읽어주시기 바란다.
다음 이야기는 추리소설의 재미가 번뜩이는 스포일러에 해당한다. 이야기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줄거리와 인생의 숨은 의미>>에서 이어간다.
댓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능력인 그릿, 자연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민들레 법칙, 그 사이 어딘가에 길이 있지 않을까요?